폐사지의 경계를 허물다. 비슬산 대견사지
<대견사지가 있는 관기봉에서 바라본 비슬산>
옛날 옛적 달 밝은 밤..
觀機(관기)와 道城(도성) 두 성사는
구름을 헤치고 노래를 부르며 비슬산에서 서로 왕래하였다고 전해진다.
비슬산은 일연선사가 오래도록 머물렀던 산으로 그 당시에는 浦山(포산)이라 불렀다.
일연선사가 쓴 삼국유사의 浦山二聖(포산이성)기록에는
觀機(관기)와 道城(도성)이라는 신라의 성사가 포산에서 살았는데
관기는 남쪽고개에 암자를 짓고 살았고
도성은 그곳에서 10리쯤 떨어진 북쪽기슭 굴속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대견사지>
북쪽 기슭 굴속이라 함은 지금의 도성암을 일컫을 것이고
관기가 기거했던 남쪽 고개라 함은 위의 대견사지를 일컫을 것이다.
대견사지의 매력은 사철 아름다움에 묻혀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빼어난 조망이 으뜸이다.
시계가 맑은 날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과 가야산,
그리고 거창의 이름있는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시야에 들어온다.
<비가 내리고 난 후 지리산까지 조망되는 여름날의 풍경>2006. 7. 23.
관기가 도성을 부르고 싶으면 산속의 나무들이 북쪽으로 머리를 숙여 맞는 시늉을 했고,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 싶으면 나무들이 남쪽으로 머리를 숙였다고 한다.
석양 1 <2007.2.11.>
세월이 지나 득도한 이들은 신선이 되어 홀연히 사라졌는데
후인들이 도성이 좌선했던 굴 아래에 절을 지어 도성암이라 했고,
관기가 있던 산마루는 관기봉이라 했는데 예전에는 관기봉 아래에 대견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석양 2 <2007.2.11.>
- 대견사지의 유래 -
9세기 신라 헌덕왕 때 중국 당나라 황제가 어느날 세수를 하려고 대야속을 들여다보니
험한 지형에 웅장한 절이 세워져 있는 모습을 보고는 황제가 중국 곳곳을 뒤졌으나 찾지 못하자
이웃인 신라에 사람을 보내 찾은 것이 바로 지금의 대견사지였다.
이에 황제가 신라에 돈을 보내 절을 짓게하고 대국에서 본 절이라 하여 대견사라고 명명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지금은 빈터에 주춧돌과 석축, 샘터만 남아 있다.
석탑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1988년 달성군에서 현재의 자리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운무속의 삼층석탑 <2007.7.29.>
비가 잠시 그친 후 <2007.7.29.>
보이지 않는 부처님을 향한 개망초의 헌화공양
산과 들에서 흔하게 피는 꽃이지만 이날 만큼은 더 없이 아름다웠다.
언제나 홀로인 삼층석탑..
그러나
결코 외롭지 않아 보인다.
하늘과 구름과 바람.. 달과 별.. 그리고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그를 감싸고
늘 거산의 그림자와 마주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스산한 절터에서 우리는 무엇을 만날 수 있을까.
절터는 빈 그릇과 같고
빈 그릇에는 많은 것을 채울 수 있다.
폐사지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고 텅 빈 공간의 경계를 허물어 보자.
일주문과 당우는 물론, 탑과 금당도 보일 것이다.
그 다음엔
부처님도 오롯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 끝 .......
2009. 1. 4. (일)
꼭지와 해병대부부 넷이서 비슬산 산행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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