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가는 기분으로.. 백두대간13 (지기재-윤지미산-화령재)
2008. 2. 3 (일) 맑음
꼭지와 둘이서
일출 07:25 / 일몰 17:54 / 음력 12.27
▣ 구간별 산행기록 07:20 지기재 09:00 신의터재 10:40 무지개산 갈림길 10:45 무지개산 11:40-12:00 안부에서 중식 13:00 윤지미산 13:30 인삼밭 임도 14:10 화령재 총 산행시간 : 6시간 50분 (15.10km) ▣ 대간종주거리 : 15.10km / 누적거리 251.83km 지기재→4.55←신의터재→4.27←무지개산→4.41←윤지미산→1.87←화령재 ▣ 접근(하산)거리 : 없음 ▣ 총 산행거리 : 15.10km / 누적거리 277.63km ▣ 식수위치 : 없음 ▣ 위험구간 : 없음 ▣ 교통 : 서대구I.C-가산I.C-상주(25번국도)-화령재 1시간20분(115km) ▣ 차량회수 : 화령⇒지기재 17,000원 (화령택시 011-521-2504) 산행개요 오늘 화령재에 내려서면 드디어 백두대간의 중화지구대가 끝나는 셈이지요. 분수령이 낮고 야산지대라 길 찾기가 애매하다고 했으나 선답자들의 산행기와 총총하게 걸어놓은 표시리본덕분에 알바 한 번 없이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리본이 하나도 없었다면 도저히 찾아갈 수 없는.. 백두대간의 미운오리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국수봉에서 약간의 조망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구간이 조망도 희미하고 별 특징도 없는 구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생략하여 뛰어넘을 수도 없는 일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지나왔습니다. 어디가 분수령인지 모를 만큼 낮은 마루금, 거기다가 야산지대와 밭, 과수원 길을 걸을 때는 지루하고 따분하였지만 산자분수령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서 좋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07:20 지기재 지기재에서 시작하는 대간길은 포도밭옆의 임도따라 100m정도 진행하다가 우측 산으로 이어진다. 도르비님이 이곳에서 알바를 15분이나 한 곳이다. 임도 따라 100m정도 가다가 대나무숲을 지나 바로 우측으로 붙으면 된다. 물론 대나무 숲 초입부에는 리본이 붙어있긴 하지만 야간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곳이다. 1차관문은 도르비님 덕분에 무사히 통과했으나 이십여 분 걸어 야산 하나를 넘으니 동네로 가는 시멘트길이다. 몸이 좀 풀리려나 했는데 또 시멘트길? 오늘의 2차 관문이다. 보통 도로에 내려서면 도로를 건너 등로가 바로 이어지곤 했는데 오늘은 건너편이 논바닥이다. 주위의 산들이 낮아서 좌측으로 가야할지 우측으로 가야할지 헷갈린다. 리본도 보이지 않는다. 논바닥으로 직진을 하여 건너편 산으로 붙을까 하다가 그건 아니다 싶어 일단 좌측 길로 내려간다. 조금 내려가 보아도 리본이 전혀 없다. 선답자들이 “50m이상 가도 리본이 없으면 무조건 백 하라.” 했으니 다시 돌아와 우측 마을쪽으로 올라가니 드문드문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리본이 보인다. 버들강아지가 하얀 솜털의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반겨준다.
▲지기재
▲야산하나를 넘으니 또 동네로 가는 시멘트길
▲벌써 봄나들이 나온 버들강아지 그러고 보니 내일이 입춘이구나. 버들강아지는 찬 겨울 속에 있으면서도 이미 봄이 왔음을 알고 있다. 오묘한 자연의 섭리 앞에 더욱 나약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100m정도 걸어가자 다시 우측 산쪽으로 길이 열린다. 산 속으로 발을 들여놓으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불안하던 마음이 금방 포근하고 편안해진다. 이제는 산짐승(?)이 된 건가? 토끼가 들판에서 개구쟁이들에게 쫓기다 산속으로 숨어들었을 때의 마음이 그러할 것이다. 신의터재까지 마루금의 평균고도는 겨우 300~400m 앞으로 세월이 지난다면 이곳은 포도밭이나 채소밭으로 모두 개간되지 않을 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대간 길 내내 포도를 따먹으며 지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중재구간에서 계속 밤송이를 까먹으며 지났듯이.. 09:00 신의터재 신의터재는 상주시 내서면 어산리에서 화동읍내를 이어주는 2차선 지방도가 지나는 고갯마루다. 팔음산포도를 알리는 대형 입간판이 서 있고, 그 옆에는 ‘신의터재’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표석 뒷면에는 신의터재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신의터재의 유래 임난 이전에는 신은현新恩峴이라 불리었다. 임난 때 의사 김준신이 이 재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의 의병장으로 상주진에서 많은 왜병을 도륙하고 임진년 4월25일 장렬하게 순절한 사실이 있은 후부터 ‘신의터재’로 불리었으나 일제 때 민족정기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어산재’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1995년 문민정부 수립 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정기를 되찾고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교육의 장으로 삼고저 옛 이름인 ‘신의터재’로 다시 고쳐 부른다. - 1996년 12월 상주시장 - 그렇다면 해발 280m인 이 나지막한 고개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때는 1592년 임진년 4월 1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마도를 출발한 왜군이 14일에 부산진성을, 15일에 동래성을, 19일엔 언양성을, 22일에는 영천성을 함락하며 물밀듯이 밀려든다. 이에 불똥이 떨어진 조정은 유성룡, 신립, 이일을 보내어 백두대간의 조령, 죽령, 추풍령에 방어선을 치고 저항한다. 바로그때, 상주 화동면의 김준신이 “남아는 마땅히 죽어야할 장소에서 죽어야 한다.”며 “나라를 위해 죽을 자는 나를 따르라.”하고 신의터재에서 의병을 모으니 그 지원자가 무려 600여명에 이른다. 4월 25일 관군 60여명과 600여명의 의병대로 전열을 갖추고 상주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군 17,000명과 싸웠으나 무기도 시원찮은 의병대로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싸우고 또 싸우고.. 그렇게 하여 김준신장군은 이곳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왜군은 이곳에서 이기긴 하였지만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자 그 화풀이로 김준신 가족이 살고 있는 윤지미산아래 판곡리로 몰려가 대학살을 시작했으며 부녀자들은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마을에 있던 깊은 연못(낙화담)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신의터재에 얽힌 이야기는 두고두고 가슴에 남을 것이다.
▲여름에 지나면 포도가 주절주절..
▲신의터재
▲무지개산 가는 길
10:45 무지개산 무지개산은 그 이름이 너무나 좋다. 여름날, 비온 뒤에 올라서면 틀림없이 오색무지개가 피어서 반겨줄 것 같은 산, 그런 산의 이름이다. 마루금에서 5분 거리에 있지만 꼭지는 무지개할배(?)가 기다린대도 안가고 싶단다. 꼭지는 기다리라하고 배낭을 벗어놓고 오르는데 사람발자국만큼이나 큰 짐승의 괴? 발자국이 또렷하다. “헉~~! 이건 호랑이 발자국이다.” 나의 외침에 꼭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설마~~?? 백두대간을 휘젓고 다니는 호랑이가 있다던데.. 백두산의 호랑이가 무지개산에 무지개 따러 왔나보다. 희미한 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니 호랑이는 간곳없고 삼각점만 홀로 외롭게 시치미를 뗀다. 베어낸 잡목사이로 멀리 가야할 대간길이 희미하게 조망된다. 무지개산에서 윤지미산 가는 길도 거의 조망권이 없다. 가끔은 판곡저수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김준신장군은 저 저수지를 놀이터로 유년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여름에는 헤엄을 치며 더위를 식혔을 것이고 겨울에는 얼음을 지치며 스케이트를 타고.. 나의 유년시절도 그랬다. 워낙 오지의 산골마을에 살았으니.. 그때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산을 두 세 개씩 넘고 초등학교에 다녔었다. 소풍갈 때는 꼭 오늘같은 이런 산길을 걸어서 가곤 했는데 문득 그때의 추억이 새삼스럽다. 야산인지 구릉인지 애매모호한 산들을 넘고 넘는다. 어릴 때 소풍가는 기분으로.. 그래도 대간인데 싶어 눈여겨 살핀다. 마루금에 위치한 과수원길도 걷는다. 과수원길 끝, 산으로 접어드는 나무에는 지인들의 빛바랜 리본도 보인다. 야산 특유의 키 작은 소나무숲길이 잠깐이나마 위안을 준다. 서서히 고도가 높아진다. 힘들어 하는 꼭지 산행을 시작한지 5시간이 넘어서고 있으니 꼭지가 힘들어할 만도 하다.
▲무지개산 갈림길
▲무지개산 오름길의 괴? 발자국
▲잡목이 다 차지하고 있는 무지개산 정상부
▲겨우 조망되는 가야할 대간길
▲윤지미산 가는 길
13:00 윤지미산 자연석에 쓴 작은 매직글씨가 이쁘다. 얼마나 노래를 잘 불렀으면 윤지미라 하였을까? 산이 노래를 부른다? 산이 노래를 부르면 어떤 소리가 날까? 그 옆에 <윤지미산 538m>라는 <대전원진사람들>들이 세운 플라스틱표지판도 이채롭다. 저런 표지판을 보는 산꾼들의 감정은 다 다를 것이지만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결코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니... 윤지미산 만큼은 조망이 좋으리라 생각했는데 이곳역시 조망은 아쉽다. 정상에 오르면 노래 소리도 들린다고 했는데.. 노래 소리는 커녕 새소리조차 조용하다. 너무 실망했는지 어느 산님이 정상부에 눈사람을 하나 만들어 놓았다. 눈사람과 놀다가라고.. 눈썹이 빠지고 입술도 떨어지고 없다. 꼭지가 다시 눈을 붙이고 했으나 표정이 영 말이 아니다. 눈사람의 심통한 표정을 뒤로하고 산을 내려서는데 경사가 만만하지 않다.
▲희미하지만 판곡저수지도 보이고
▲윤지미산
▲윤지미산 지킴이
▲명당?
햐~~! 너무 급경사라 꼭지가 탄성을 지른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이젠을 하였지만 빙판이라 조심조심 내려선다. 잘 다듬어진 묘지를 지나면서 드디어 전망이 트인다. 판곡저수지가 환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어느 조상의 묘인지는 모르지만 명당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 임도가 보이더니 이제는 인삼밭이다. 사철 새카만 지붕을 이고 사는 인삼은 맨날 하늘을 쳐다보는 쑥부쟁이가 부럽다고 했다. 가을이면 지천에 피어나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쑥부쟁이지만 인삼은 그녀가 부럽단다. 몰래 인삼밭 속을 들여다본다. 어린 새순이 돋아나고 있다. 엷은 햇살도 뒤질세라 훔쳐본다. 앞으로 최소 5년, 그 긴 세월을 향한 묵묵함.. 그 속에서 도란도란 어린 인삼들의 이야기소리가 들린다. 앙상한 감나무가 어린 인삼들의 재잘대는 소리에 귀를 대주고 있다.
▲뒤돌아본 윤지미산
▲새로 개통된 상주-청주간 고속도로
▲드디어 중화지구대의 끝.. 화령재
인삼밭을 지나는데 질퍽한 산길이 등산화에 흑칠을 한다. 이 또한 봄이 오는 징조다. 윤지미산을 내려서면 금방 화령재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또 구릉인지 야산인지를 몇 개 더 넘고 넘는다. 간간이 자동차소리도 들리고 새로 개통된 상주-청주간 고속도로가 시야에 들어온다. 저 고속도로 터널위를 지나면 화령재일 것이다. 드디어 중화지구대가 끝나는 순간이다. 시원섭섭한 중화지구대가.. - 끝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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