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아침이 아름답다. 서성재를 지나 철계단을 올라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산마루는 몽롱한 의식에서 깨어나는 듯 신비롭다. 겹겹히 이어지는 준봉들은
옅은 안개속을 뚫고 하늘과 땅 그 경계에 섰다. 아침 햇살에 도도함을 뽐내는 소나무 너
머로 펼쳐지는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다.
고대 神들의 기운이 감도는 곳 '가야산 六大神將'
2011. 3. 13.
육대신장이 있는 일요암터는 출입이 통제된 지역이라 흔적없이 다녀와야 한다.
산꾼이 산에 남기는 것은 발자국 뿐이어야 하지만 때로는 마음마져 내려놓고 올 때가 있다.
육신보다 마음이 더 무겁기 때문일까? '출입통제'라는 금줄을 넘으면 바스락 거리는 낙엽의
감촉이 온몸에 찌릿찌릿 전해온다. 그것은 원시적인 상쾌함이자 원초적인 유혹이다. 그래서
산꾼은 그러한 초대로의 욕구를 억누르기가 힘들다. 곧이어 백운동 방향으로 짠! 하고 조망
이 트인다. 운해가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이른 아침의 이러한 은은한 풍경이 참 좋다.
일요암터 육대신장(六大神將)은 동성봉 자락에 앉아 매일매일을 만물의 군상을 바라보며
세월을 나눈다. 만물상 상아덤에는 가야국의 전설이 서려있고, 백운동 법수사에는 1000여
개의 부속암자가 이곳 가야산에 산재해 있었다는데 일요암도 그 중의 하나로 전해진다.
지금은 건물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나 축대위에는 六大神將으로 불리는 육각형 돌기둥이 서 있다. 각 면
에는 '정축, 정해, 정유, 정미, 정사, 정인신장'이라 음각되어 있고, 그 기둥 둘레에는 18개
의 장방형 석재가 세워져 있다. 가야산은 이래저래 고대 神들의 기운이 감도는 곳이다.
일요암은 고려말기에 성주 출신 상호군 송천우가 그의 처백부인 성산부원군 도길부의 노년을
위하여 창건했다고 전한다. 1800년대 말까지 이름난 암자로 이어져 왔으며, 도길부는 성주의 옛땅
팔거현(칠곡)의 호족으로 1380년 이성계와 함께 남원 운봉대첩에서 왜구를 크게 토벌한 명장
이었다. 그러나 고려왕조를 향한 충성을 굽히지 않자, 최영 등과 수구세력으로 몰려 심원사에
피신하게 되었다. 이때 심원사 석존상 스님의 보호로 구명되어 이곳에서 학문과 풍월을 벗삼아
정권 말기 중앙관직의 번뇌를 식혔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일요암터의 기도처 석굴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만물상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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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아침이 아름답다. 서성재를 지나 철계단을 올라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산마루는 몽롱한 의식에서 깨어나는 듯 신비롭다. 겹겹히 이어지는 준봉들은
옅은 안개속을 뚫고 하늘과 땅 그 경계에 섰다. 아침 햇살에 도도함을 뽐내는 소나무 너
머로 펼쳐지는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다.
상왕봉(우두봉) 정상에 섰다. 늘 꿈결처럼 다가오는 수도-가야 능선,
두리봉과 단지봉, 수도산의 늠늠한 봉우리는 그 자체가 설레임이다.
소의 코에 해당한다는 우비정은 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 봄이 되어 얼음이 녹으면 이곳은 비단개구리의 놀이터가 될 것이다.
저 아래 계곡 끝나는 지점에 희미하지만 '두물산방' 까만 기와집이 보인다.
작년 여름 '두물산방'에서 바라본 가야산
언제부턴가 가야산에는 정상이 두 개 생겼다. 하나는 칠불봉, 또 하나는 상왕봉(우두봉)이다.
그러나 세간의 입방아와는 달리 산은 그저 묵묵할 뿐이다.
ㅡ END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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