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전고투' 백두대간16 (늘재-청화산-대야산-버리미기재)
2008. 3. 9. (일) 맑음
꼭지(아내)와 둘이서
일출 06:45 / 일몰 18:28 / 음력 2.2
▲대야산 로프구간
▣ 구간별 산행기록
06:20 늘재
06:55 '정국기원단'제단
08:10 청화산
09:55 갓바위재
10:40 조항산
10:40-11:10 알바
11:20-11:40 중식
12:15 고모치(고모샘)
13:00 마귀할멈통시바위 갈림길
14:35 밀재
15:05 코끼리바위
15:50 대야산
16:55 촛대재
17:15 촛대봉
17:32 불란치재
18:30 곰넘이봉
19:20 버리미기재
총 산행시간 : 13시간 (17.49km)
▣ 대간종주 거리 : 17.49km / 누적거리 301.45km (포항셀파 기준)
늘재→2.49←청화산→3.7←갓바위재→1.15←조항산 →4.35←밀재→1.25←대야산→4.55←버리미기재
▣ 접근(하산)거리 : 없음
▣ 총 산행거리 : 17.49km / 누적거리 329.65km
▣ 식수위치 : 고모치(고모샘)
▣ 위험구간 : 대야산 로프구간
▣ 필수준비물 : 아이젠 및 보조자일(10m)
▣ 교통 : 서대구I.C-가산I.C-상주-갈령-늘재 / 운행시간 2시간 (130km)
▣ 차량회수 : 버리미기재⇒늘재 25,000원 ( 트라제 011-803-6463 )
산행개요 (늘재-청화산-조항산-대야산-곰넘이봉-버리미기재)
오늘 구간은 꼭지(아내)를 동반하고 겨울철에는 가서는 안 되는 구간이었다.
홀로 갔으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근력이나 담력이 약한 꼭지에게는 무리였다.
청화산, 조항산, 대야산, 명세기 이름 있는 ‘산’이 3개에 그것도 모자라
촛대봉, 곰넘이봉 등 봉우리가 2개를 더하고
그 아래에는 갓바위재, 고모재, 밀재, 촛대재, 불란치재 등 꼭지가 제일 싫어하는 오르고 내려야 할 고갯마루가 5개,
중간중간 수도 없이 오르고 내린 이름 없는 봉우리까지.. 정말 진을 빼는 구간이었다.
조항산에서는 꼭지가 리본 따라 직진하여 반대쪽인 갓바위봉으로 빠지고 말았다.
서로가 길이 엇갈려 30여분 애타게 찾아다니며 이산가족의 아픔을 맛보기도 했고, 대야산 로프구간에서는
80여m의 로프 하나하나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꼭지가 바톤 터치하듯이 로프를 바꿔 잡을 때 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고 봉우리를 하나씩 넘어설 때마다
하산 길은 모두 북향이라 빙판을 이루고 있어 진행하기가 힘들었다.
아이젠을 신었다 벗었다 수도 없이 반복하고
나중에는 귀찮아서 그냥 가다가 호되게 엉덩방아를 찍기고 했다.
▲청화산을 오르며 뒤돌아본 속리의 주능선
▲가야할 조항산과 대야산, 그리고 중대봉의 대슬랩
▲조항산
▲조항산에서 뒤돌아본 청화산과 멀리 속리의 주 능선
급경사에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나무뿌리와 튀어나온 돌부리를 잡으며 내려섰다.
하찮고 보잘 것 없던 그들.. 평소에는 걸그적 거리던 돌부리 하나 그 존재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것조차도 없는 곳에서는 보조자일을 설치해서 내려가야 했다.
별로 쉬지도 않았는데 17km의 짧은 거리를 통과하는데 알바 30분을 빼더라도
무려 12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마지막 곰넘이봉을 내려서니 로프를 타고 올라야 하는 또 하나의 봉우리가 있었다.
로프를 피하려고 좌측 우회길로 들어섰다가 날은 어두워지고 랜턴을 켜고
희미한 족적따라 탈출아닌 탈출을 감행하며 버리미기재 도로에 내려설 때까지 긴장의 연속이었다.
겨울에는 피하라는 늘재-대야산구간.. 소문대로 대간 맛을 톡톡히 본 산행이었다.
다시는 대간 하지 않겠다는 꼭지, 죽어도 절대 대야산에는 가지 않겠다는데
과연 그 맹세가 얼마나 갈지 의문이긴 하다.
성황당 신령님께 고하고..
산행을 함께 하시겠다던 산그림자님부부가 갑작스런 사정으로 내려오지 못한다고 전화가 온다.
지리 서북능선산행이후 오랜만에 함께할 기회였는데 아쉽지만 어쩌랴.
이로서 둘 만의 버거운 대간길이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오늘 늘재에서 버리미기재구간은 보통 10시간에서 11시간정도가 걸린다고 하니
꼭지의 걸음으로는 12시간이상이 소요될 것이다.
6시에는 산행을 시작해야 되겠다 싶어 일찍 집을 나서려고 했는데 시계는 벌써 4시20분이다.
06:20 늘재
가산I.C에 내려 국도로 쉬엄쉬엄 올라왔더니 2시간이 걸린 셈이다.
고갯마루에는 이미 관광버스가 한 대 정차되어 있고
한 무리의 산꾼들이 이마에 불을 켜고 문장대방향으로 숨어든다. 남진하는 대간꾼인가 보다.
우리도 고개를 넘어 좌측 창고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산행준비를 한다.
아직 어둠이 대간꾼을 지켜준다는 성황당에 머물러 있어 어째 분위기가 으스스하다.
“똑똑! 신령님 계세요?”
지난번 속리의 고마운 신령님이 생각나 인사를 해도 대꾸가 없다.
날도 밝기 전에 벌써 문장대로 출타를 하셨나?
그래도 살아 돌아오게 해주십사 하고 성황당에 고하고 산문에 들어선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어서 랜턴을 켜지 않고 오른다.
늘재의 공기가 상쾌하고 부드러운 마사토 흙길을 걷는 감촉이 너무나 좋다.
미끈한 바위들이 어우러지고 그들을 비집으며 뿌리를 내린 분재소나무가 손을 잡아주고 당겨준다.
‘정국기원단’ 제단 앞에 올라서니 지나온 문장대구간과 속리의 주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우측에 관음봉과 좌측으로 천황봉까지.. 하지만 옅은 박무로 인하여 조망이 깨끗하진 못하다.
▲‘정국기원단’에서 바라본 속리산
▲지나온 대간 길
▲형제봉 방향
잠시 퍼질고 앉아 쉬고 있는데 한분의 대간꾼이 올라온다.
진해에서 오셨다는 분인데 제 작년 초겨울에 시작해서 시간 나는 대로 조금씩 대간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분과는 조항산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행했는데 꼭지가 알바하고부터는 만나지 못했다.
산꾼의 인연은 그렇게 오고갔다. 무사히 버리미기재까지 가셨기를 빌어본다.
이중환이 극찬한 청화산
힘든 오름짓이 계속되고 청화산은 그만큼 점점 더 가까워진다.
자석에 이끌리듯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면 새벽잠에서 깨어나는 백두대간 속리의 능선들이
추억에 젖게 만든다. 문장대와 청황봉도 보이고 멀리 조그마한 봉우리는 형제봉같다.
실안개 피어오르는 상주 화북방향의 전경은 이른 아침에만 만날 수 있는 한 폭의 그림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스스로의 호를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칭하고
다음과 같이 청화산을 극찬했다고 한다.
‘청화산은 내선유동과 외선유동을 위에 두고, 앞으로는 용유동을 가까이 두고 있는데,
수석의 기이함은 속리산보다 훌륭하다. 산의 높고 큼은 비록 속리산에 미치지 못하나,
속리산 같은 험한 곳은 없다. 흙으로 된 봉우리에 둘린 돌은 모두 밝고 깨끗하여 살기가 적다.
모양이 단정하고 좋으며 빼어난 기운을 가린 곳이 없으니 거의 복지福地다.’
08:10 청화산
정상부는 잡목에 가려 소문보다 조망이 없지만 작은 정상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겨준다.
정상을 내려서면 시루봉 갈림길까지 부드러운 능선이 이어진다.
하지만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시루봉으로 가고 대간은 9시방향 좌측길이다.
아이젠을 하지 않고는 내려갈 수 없을 정도의 급경사 빙판이라 아이젠을 하고 조심조심 내려선다.
청화산에서 조항산까지는 거리가 5km에 달하는 장대한 능선이다.
40여분 편안한 능선길이 이어지는데 오늘 중 유일한 육산의 맛을 즐기는 구간이다.
서서히 암릉이 나타나고 이때부터는 아기자기한 암릉을 타고 넘으며 바라보는 조항산은 매력적이다.
능선 우측으로는 둔덕산이 부드럽게 솟아있어서 그 쪽이 대간길이 아닌가 착각이 든다.
암릉길은 막힘없이 조망을 즐길 수 있고 지루하지 않으니 꼭지가 무척 좋아한다.
▲청화산을 내려서면서 바라본 가야할 조항산과 대야산
▲시루봉 라인
▲조항산과 둔덕산
▲조항산 가는 길의 암릉구간
▲뒤돌아본 아기자기한 암릉구간과 858봉 뒤로는 청화산
알바하기 쉬운 조항산
갓바위재 헬기장에서 20여분 오르니 조항산의 암봉이 지척인데 그 웅장함이
마치 덕유산 서봉을 연상케 한다. 등로는 좁은 암벽사이로 이어지고 그 아래는 절벽이라 주의를 요한다.
꼭지는 걸음도 느리지만 겁이 많아 조심하고 덤범되지 않는 성격이라 위험구간에서도 안심이 된다.
뒤를 돌아보면 지나온 대간길이 가슴을 흐믓하게 한다. 멀리 속리산 주능선도 아직까지 시야에서 떠나지 않는다.
옛날 견훤이 활을 쏘며 무예를 연마한 평화로운 궁기리 마을을 내려다보며
부서진 잔돌이 굴러 떨어지는 마지막 경사를 치고 오른다.
10:40 조항산
청화산에서 2시간30분이 걸렸다.
멀리서 보면 갓바위봉으로 이어지는 정상부가 새의 머리를 닮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전망대역할을 하는 바위가 하나 있고, 그 앞에는 작은 정상석이 마귀할멈(?)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있다.
가야할 마귀할멈통시바위와 손녀마귀, 좌로는 중대봉의 대슬랩과 대야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조항산의 위험한 암릉구간
▲견훤이 야망을 꿈꾸며 무예를 연마한 궁기리의 평화로운 모습
▲지나온 청화산까지의 마루금
▲삼송리 방향
▲조항산에서 바라본 가야할 마귀할멈통시바위와 대야산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금강산 남쪽에서 가장아름다운 산이다.’ 라고 극찬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산사면이 광산과 채석장으로 파헤쳐져 흉물스런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인간의 몸을 저렇게 도려냈더라면 고통소리가 하늘 끝까지 울려 퍼졌을 터인데 자연은 말이 없다.
이중환이 살아나와 저 모습을 보았다면 얼마나 가슴을 치고 통곡할 것인가.
119를 대신한 휴대폰
잠시 상념에 잠겼다가 몇 컷의 사진을 찍고 고개를 돌리니 꼭지가 보이지 않는다.
“아직 정상에 올라오지 않았나? 올 시간이 넘었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어 왔던 길로 다시 뒤돌아가 보아도 꼭지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다. 앞서 간 건가?” 또 부른다.
역시 대답은 없다. 나의 목소리만이 산정에 메아리 되어 맴돌 뿐이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얼른 전화를 건다.
삐리릭! 다행이 이 높은 산정에도 휴대폰이 터지고 곧이어 꼭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디 있는데?”
“눈이 많이 쌓인 길을 내려왔는데 깎아낸 산도 보이고.”
“깎여나간 산이 보인다고?” 그래서 이미 앞서간 걸로 생각했다.
“기다려. 빨리 갈 테니.”
조항산을 내려서니 미끄러운 급경사 빙판길이다.
아이젠은 모두 내 배낭에 있는데 이 미끄러운 길을 어떻게 내려갔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아이젠을 착용할 여유도 없어 조심조심 나무뿌리를 잡으며 내려선다.
멀리 빨간 배낭이 보인다. “꼭지가 가고 있구나.” 착각하고 말았다.
그 배낭의 주인공은 조금전에 내려간 진해 대간꾼의 것이었다. 그분의 배낭도 빨간색이었다.
가는 중에 부부산꾼이 올라온다. 그분들께 물어보려다가 내려갔겠지 싶어 그냥 간다.
'고모치0.9km'이정표가 있는 삼송리 갈림길에 도착해도 꼭지는 보이지 않는다.
때 마침 진해 그분이 삼송리방향에서 다시 올라온다. 고모치방향으로 가야했는데 좌측으로 가서 알바를 했단다.
혹시나 싶어 꼭지를 보았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보지못했다고 한다.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틀림없이 꼭지는 조항산에서 직진하여 갓바위봉으로 빠진 것이리라.
휴대폰이 터지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 또 전화를 건다.
“삐리릭~~!!” 터진다!
오늘은 휴대폰이 119를 대신하는구나.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어디긴 어디야. 당신 기다리고 있지. 왜 안와~~.” 이외로 꼭지의 음성은 차분하다.
“바보야 당신은 반대쪽으로 갔잖아.”
“이쪽에도 리본이 있던데, 그 리본은 뭐야.”
“바보!” 어휴~
그제야 꼭지도 사태를 짐작했는지 다시 올라오겠다고 한다.
그냥 기다리기가 불안해 한쪽 구석에 배낭을 벗어놓고 다시 조항산을 오른다.
꼭지가 겁먹은 표정으로 서 있다. 이산가족이 만나면 이런 심정일까?
미우면서도 반가웠다.
조항산에서 꼭지는
작은 정상석을 보지 못하고 리본 따라 갓바위봉으로 직진하여 눈이 많이 쌓여있는 길을 내려가니
바위전망대가 있고 그곳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산을 깍아낸 채석장이 더 잘 보였을 것이다.
“이 양반이 올 시간이 지났는데 왜 안 와.”하며 투덜대다가 그냥 내려가려던 참에 전화를 받은 것이다.
전화도 터지지 않고 계속 그대로 내려갔으면 어찌할 번했나 싶다.
하산할 때처럼 계속 내려가는 길이었지만 대간길이 워낙 오름과 내림이 심하니
꼭지가 이대로 내려가다가 또 올라가겠지 생각했다고 하니 원~~
원래는 조항산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났더니 더 배가 고프다.
배낭을 벗어놓은 곳까지 와서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몇 몇의 산꾼들이 지나가며 인사를 건넨다. 아마 삼송리 의상동에서 올라오는가 보다.
의상저수지에서 시작하여 조항산~청화산으로 하산하는 원점회귀코스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귀할멈바위 가는 북사면의 빙판길은 갈 길 바쁜 걸음을 더욱 느리게 한다.
아이젠을 하고서도 미끄러워 엉금엉금 기어서 내려간다. 이래서 고수들이 겨울에는 피하라고 했던가 보다.
봉우리 하나를 넘으면 또 내려가고 또 올라가고 계속 반복된다.
내려가는 길은 거의 전 구간이 빙판이다.
어떤 구간은 나무뿌리도 하나 제대로 잡을 것이 없어 가져간 보조자일의 힘을 빌린다.
‘악전고투’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오늘 대간 맛을 아주 톡톡히 보는구나.
마귀할멈통시바위 아래로 펼쳐지는 기암들의 형상이 기기묘묘하다.
잠시 가슴을 진정시키며 위안을 받는다.
▲계속되는 빙판길
▲자손들에게 부끄러울 작금의 대간 길.. 흉물스런 채석장과 마귀할멈통시바위 그리고 대야산
석간수 한 컵은 보약 한 첩
12:15 고모치
이곳은 경북과 충북을 잇는 12km가 되는 험준한 재로써 옛날 고모와 홀로된 질녀가 살았다고 한다.
질녀가 병사하자 고모가 이를 애달프게 여겨 식음을 전폐하고 재에 올라 질녀의 이름을 부르다 쓰러져 죽자
후세 사람들이 고모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곳을 고모재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고모의 아름다운 마음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
이정표에는 이곳에서 10m아래에는 고모샘이 있다고 하여
식수도 보충할 겸 샘터를 행해 빙판길을 내려서니 바위틈에서 물이 조금씩 새어나온다.
샘터 옆에는 물을 떠서 마시기 쉽도록 어느분이 등산용 컵을 얹어 놓았다.
한 컵 떠서 들이키니 물맛이 일품이다. 맛은 차고 부드러웠다.
▲고모샘의 석간수.. 바위틈을 비집고 물이 제법 흘러내린다.
▲마귀할멈통시바위와 손녀마귀바위
▲누워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마귀할멈
▲뒤돌아본 조항산과 청화산
▲계속되는 빙판길에 지쳐가는 꼭지
이제는 고모샘의 물심(?)으로 가야지.
계속되는 오름 길.. 멀리 마귀할멈바위의 위용이 대단하다.
그 능선따라 이어지는 둔덕산 라인은 햇살에 반짝여 더욱 잿빛이 도드라진다.
어느 분은 저 길로 알바를 하여 용추계곡으로 내려가 다시 밀재로 올라왔다고 했다.
마귀할멈통시바위 갈림길에서 리본이 많은 좌측 길로 간다.
갈림길에서는 조망이 없다.
‘원호’님 산행기에는 우측으로 조금만 가면 마귀할멈전망대가 있다고 했는데 그때는 몰랐다.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다음에는 꼭 가봐야지.
뒤를 돌아보면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 언뜻 비쳐지는 마귀할멈이 여러 모양으로 변해 보인다.
오똑한 코, 하늘을 향해 입을 쩍 벌리고 드러누운 섬뜩한 모습 같기도 하다.
마귀할멈, 그것도 모자라 손녀마귀까지 합세하여 겁을 준다.
바로 그 순간 뒤에서 콰당! 하는 소리가 들린다.
빙판길에 꼭지가 또 넘어진다. 크게 다치진 않아 보여 다행이지만 마귀의 장난인가.
얼른 이 길을 벗어나고 싶다.
악전고투한 대야산 로프구간
14:35 밀재에 도착하니 대야산에서 하산하는 산님들이 많이 보인다.
이곳에서부터 대야산, 장성봉, 악희봉까지가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하니 당연히 출입금지구역이다.
또 죄인이 된다. 세상살이 자체가 죄의 굴레이고 인생 또한 그 가운데 있다.
경사길.. 악을 박박쓰며 있는 힘을 다해 오른다. 아슬아슬한 로프도 타고.. 그러나 대야산은 오리무중이고
중대봉의 대슬랩이 멀리서 위압감을 준다.
“대야산은 하늘보다 높은데 있는가 보다.” 꼭지가 투덜거린다.
▲밀재
▲코끼리바위
▲대야산을 오르며 뒤돌아본 백두대간
▲가야할 촛대봉과 봉우리가 두 개인 곰넘이봉, 뒤로는 장성봉과 희양산
▲오름과 내림의 굴곡이 심한 지나온 능선들..
▲대야산 정상부
▲대야산은 하늘위에?
15:50 대야산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동서남북 막힘이 없다.
시계가 깨끗하고 약간의 운해만 받쳐 준다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것이다.
가야할 장성봉과 우측으로 파리가 앉으면 미끄러질 것 같은 암벽의 희양산도 보인다.
아래로는 촛대봉이 오똑하고 가야할 곰넘이봉은 색안경을 끼고 우리를 주시한다.
▲대야산에서 꼭지 인증샷
▲문경선유동 방향
▲대야산과는 대조적으로 부드러운 둔덕산
그러나 감상도 잠시뿐 로프구간이 기다리고 있다.
스틱을 집어놓고 대체로 수월한 3개의 로프구간을 내려선 후 아래를 내려다본다.
거의 직각에 매달린 로프.. 그 아래는 까마득한 절벽이다.
떨어지면 인생도 끝이고 대간도 오늘로서 끝이다. 부상이 아니라 사망이다.
사전에 답사까지 했다면서 어떻게 이런 곳에 날 데리고 왔냐며 꼭지가 원망스런 눈길을 보낸다.
그때는 겨울이 아니어서 이렇게 위험한 줄 몰랐었다.
‘람보’도 하기 힘든 일을.. 너무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이 아니냐는 투다.
애서 못들은 척 해보지만 나의 가슴도 철렁한다.
설악산의 울산바위도 고소공포증으로 철계단을 올라가지 못해 중간에서 포기하였는데 괜히 데려왔구나 후회도 된다.
그러나 주흘산 부봉의 로프구간도 무난히 해냈고 덕유산의 할미봉구간도 두 번이나 거뜬하게 내려갔으니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자~~ 힘을 내자.” 스스로 다짐한다.
그러나, 혹시 이곳에서 무슨 사고라도 나면? 방정맞은 생각도 들지만 꼭지를 믿자.
내 스스로부터 꼭지가 해 내리라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대간을 시작한 많은 여인들이 이 구간을 통과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만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꼭지에게 자신감을 심어준다.
▲대야산 로프구간 1
▲대야산 로프구간 2
▲대야산 로프구간 3
꼭지가 벌벌 떨면서도 로프를 잡는다. 지금은 살기 위해서다.
한 구간, 두 구간을 지나고 세 번째 구간에서는 정말 공포심을 자아내는 아득한 절벽이다.
꼭지가 망연자실 제자리에서 꼼짝을 않는다.
다시 올라갈 수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
일말의 불안감이 뇌리를 스친다. 우리는 과연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고 무조건 로프만 곽 잡아, 힘을 내~~.”
“보이는데 어떻게 안 봐.”
입이 마르는지 사탕을 하나 입에 물더니 로프를 잡는다.
내 마음은 더 조마조마해진다.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공포의 대야산은 그렇게 우리를 내 쫓고 있었다.
마지막 로프를 놓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쉰다.
친구가 대야산에 가려고하면 도시락사들고 쫓아다녀서라도 말리겠단다.
꼭지가 엄청 시껍했는 모양이다.
주흘산 암릉구간에서는 절대 안따라갈 것이니 혼자가라고 한다..
촛대봉을 오르는데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노을빛이 너무나 곱다.
그러나 빨리 대야산을 벗어나고 싶은데...
“어서 와~~!” 하며 또 로프가 손을 내 민다. 거절 할 수가 없다.
밉다고 그것도 양쪽에 로프가 매여 있다. 좌측으로 우회로가 있었지만 그때는 몰랐다.
이쪽에서 시도해보고, 저쪽에서 시도해보고.. 꼭지가 겨우 오른다.
꼭지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거의 탈진상태인 것 같다.
불안한 마음을 가득안고 불란치재에 도착한다.
지난번 답사할 때는 이곳에서 용추계곡으로 하산했었다. 주차장까지 채 40분도 걸리지 않았다.
“탈출을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이제 다와 가는데 싶어 계속 진행한다. 결국 1시간 50분이 걸렸지만..
능선에는 겨울잠에 빠진 굴참나무가 두꺼운 표피를 자랑하며 숲을 이루고 있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가슴의 열을 식힌다.
▲불란치재.. 이곳에서 40분이면 문경선유동 주차장까지 탈출(하산)할 수 있다.
▲기암과 대야산
20여분 편안한 능선이 이어진다. 그것도 잠시뿐 암봉이 앞을 가로막는다.
또 로프구간이다. 3m정도 짧지만 오르기가 까다롭다. 꼭지가 안간힘을 써도 올라가지 못해 엉덩이를 밀어 올린다.
힘은 놔뒀다 어따 쓰는지 모를 일이다. 사진에 많이 보아왔던 혹 같이 생긴 기암이 보이고
그 뒤로는 대야산이 우뚝하다.
로프구간이 더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곰넘이봉에 오를 때까지 로프는 보이지 않는다.
정상부는 넓은 너럭바위로 되어있고 정상석은 작지만 위엄이 느껴진다.
서서히 어둠에 잠기고 있는 대야산.. 저기를 어찌 내려왔을까 바라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해는 소리 없이 넘어가고 잠시의 침묵이 호들갑을 떤 우리의 마음을 진정시켜준다.
▲곰넘이봉에서 바라보는 둔덕산
곰넘이봉의 탈출
18:30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 서둘러 정상을 내려선다.
곧 이어 두 번째 암봉이 앞을 막아서니 이제는 조망이고 뭐고 아예 지겨울 지경이다.
“또 로프네~~” 하며 꼭지가 한숨을 짓는다.
지도에는 저 봉우리를 내려갈 때도 3개의 로프구간이 있고 그 중에 하나는 위험구간이라 했다.
좌측으로 우회길이 보인다.
기진맥진한 꼭지를 보니 로프를 탈 엄두가 나질 않는다. 망설일 필요 없이 우회길로 들어선다.
리본은 보이지 않으나 눈 위에 찍힌 족적이 뚜렷하여 계속 진행한다.
두 어 군데 급비탈 빙판인데 나무뿌리조차 하나 잡을 것이 없다.
꼭지가 또 미끄러지면 어쩌나 싶어 보조자일을 설치해주니 수월하게 내려간다.
그런데 갈수록 발자국이 희미해진다. “처음에는 뚜렷했는데 왜 그렇지?” 혼자 생각해 본다.
“우회길인 줄 알고 사람들이 이곳으로 왔다가 다시 돌아갔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돌아갈 수가 없다.
꼭지가 거의 탈진에 가까워 뒤돌아갈 힘도, 로프에 매달릴 힘도 없기 때문이다.
간혹 리본도 보이고 희미한 길 따라 족적이 이어진다.
이상한지 꼭지가 한 마디 한다.
“길이 아닌 것 같다.” 그때에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나 보다.
“나도 알아. 정상 등로는 아니지만 이 방향으로 가면 도로가 나올 거다.” 꼭지를 안심시킨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불안한 마음을 안고 긴 시간을 내려간 것 같다.
버리미기재 도로가 나올 시간인데..
“봐라, 여기도 리본이 걸려있네.” 하며 불안해하는 꼭지를 안심시킨다.
멀리 어둠속에서 도로가 희미하게 보인다.
“다 왔다.”
자동차가 한 대 지나간다. 자동차의 불빛과 소리.. 속세의 세상이 이렇게 반가운 줄 몰랐다.
꼭지는 조난당해 산에서 밤을 보내야 될 줄 알았다고 한다.
ㅋㅋ.. 서방님을 아주 물로 봤네~~.
작은 개울을 건넌다.
대간도 하다보니 개울을 건너는구나. 마루금에서 아래쪽으로 조금 벗어난 곳이다.
19:20 시간이 멈춘다.
하늘에 걸린 초생달이 가냘픈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 한다.
“오늘 대간은 무효야.”
- 끝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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