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빛의 향연'
덕유산 환종주3 (삿갓재-무룡산-횡경재)
2012. 2. 12. (일) / 05:30 - 13:30
산사랑방
동행과 빈자리
2월 16일부터는 산불경방기간으로 4월 30일까지 국립공원 대부분의 등산로가 폐쇄된다.
지난번 이수영님의 산행기를 보고 아차! 싶어 이번 주에는 꼭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3년 전 덕유산 환종주를 시작할 때, 나름대로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걷는데 의미를 두기
보다는 4계절 산정에서 펼쳐지는 덕유의 아름다움을 담아보고 싶었다. 그중에 첫째는
뭐니 뭐니 해도 겨울설경이 아닌가 싶다.
황점에 도착하니 5시 30분, 2시간이 걸릴 줄 았았는데 채 1시간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이만하면 결코 먼 거리가 아니다. "가야산만 대구에서 가까운 줄 알았더니
덕유산도 무척 가가운 곳에 있었네." 혼자 중얼거리며 산행준비를 한다.
대간할 때 이곳에서 빼재까지 걸었을 때는 꼭지가 고생을 많이해서 두 번 다시
대간 안 한다고 투덜대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관광버스가 한 대 정차해 있고
금방 내린 듯한 산님들이 웅성거리며 몸을 풀고 있다. 그들을 뒤로하고 난 혼자
산문으로 걸음을 옮긴다.
어둠때문인지 익숙한 길인데도 낯설게 느껴진다. 잠시 뒤
한 분의 산님이 따라붙더니 이 길이 맞느냐고 묻는다. 초행길이라 초입이 어딘지
몰라서 관광버스에서 내린 분들을 따라붙으려 했는데 도대체 갈 생각을 않더라는
것이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난 동행이 아니던가.
길이 미끄러워 아이젠을 하고 이런저런 얘기로 서먹함을 달래며 달빛이 부서져내린
하얀 눈길을 함께 걷는다. 뽀드득거리는 발걸음소리가 무척이나 정겨운 밤이다.
황점까지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더니 아내가 태워주었으며 숙소는 거창읍내에 정해
놓았다고 한다. 어제는 향적봉에 올랐고 오늘은 곤도라타고 무주리조트에서 가족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분은 주말을 멋지게 즐기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꼭지 생각이 간절하다. 수도가야종주할 때는 꼭지도 늘 태워주곤 했었지...
오늘따라 함께하지 못한 꼭지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
삿갓대피소에 올라서니 날이 밝아오고 몇명의 산님들이 산행준비를 하느라 분
주하다. 동행한 분은 가족과의 약속때문에 바쁘신 것 같아 먼저 가시라 하고,
랜턴을 끄고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예전부터 무룡산의 새벽풍경은 어떨까 무척
궁금했다. 삿갓대피소에서 일박하지 않으면 무룡산일출을 기대하기란 쉬운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온은 영하 15도, 능선에는 바람이 차갑다. 비록 기대했던 서리꽃은 자취를
감췄지만 아쉬움은 없다. 늘 그래왔듯이 산은 자신을 다 드러낸 적이 없었으니
오늘 보여주는 유리구슬같은 맑고 파란 하늘빛 만으로도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시간이 빚어내는 마법같은 아름다움
요즘들어 새벽풍경을 바라보면 무척 자극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출시간대의
산빛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자연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을 갖게해줄 뿐만 아니라
무심해지고 게을러지는 산심을 일깨워준다. 호남도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눈부신 새벽빛이 온 하늘에 넘쳐흐른다. 시간이 빚어내는 마법같은 아름다움이다.
시간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을 뿐만아니라 존재 자체도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시간을 따지고 시간에 죽고 산다. 시간을 제어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의 여행
도 가능하지만 꿈 같은 얘기다. 단지 시간의 흐름을 즐길 뿐...
멀리 지리산 연봉들이 줄지어 안개속으로 솟아올랐다.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뭉클 설레이는 지리산, 아! 저기는 언제 또 가볼거나...
남덕유산과 삿갓봉위에도 아름다운 새벽빛이 스며든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
무룡산 헬기장에 도착하니 산악잡지에 광고모델로 자주 등장하는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하지만 국립공원에서는 야영이 금지되어 있고 취사도 지정된 곳에서만 허용된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지켜져야 하고 꼭 지켜야만 하는 산과의 약속이다.
무룡산 정상에는 텐트가 네 동이나 쳐저 있었고 주위는 지저분했다.
심지어 보란듯이 버너에 불을 붙이고 요리까지 하고 있었다. 많은 산님들이 그
광경을 보고는 눈살을 지푸리며 침묵으로 지나갔다. 요즘에는 최소한의 질서
마저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도 자연은 말이 없고 그 모든 것을 감싸안으며 고고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무룡산 정상을 점령한 텐트촌>
백암봉 가는 길
상념을 접고 무룡산에서 가야할 길을 가늠해 본다.
멀리 철탑이 사라진 향적봉이 시원하다. 중봉은 하얀 눈을 이고 섯고, 그 아래
백암봉으로 이어지는 회색빛의 능선들이 허리를 내주며 어서오라고 재촉한다.
아! 가야산이다. 단지봉과 수도산 라인도 환상적이고
뒤를 돌아보면 남덕유산와 장수덕유산, 삿갓봉의 위용이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산초보 때 꼭지와 자주 걸었던 길, 너무나 많은 추억을 간직한 곳이 아닌가.
눈의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구상나무가 대견스럽다. 크리스마스트리로
주로 상징되는 나무다. 눈이 아무리 쌓여도 부러지는 법이 없이 겨울내내 눈을
이고 산다. 중봉과 향적봉 근처에 많이 자생하는데 주목과 더불어 오가는 사람
들의 단골 모델이 되곤 한다. 구상나무는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세계유일의
한국특산수종이다.
능선에는 바람에 날린 눈이 쌓여서 이 또한 산을 이루고
앙상한 가지끝에 매달린 눈송이가 하얀 복슬강아지처럼 탐스럽다.
중봉, 백암봉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고 이제 2km만 가면 동엽령이다.
점점 가까워지는 동엽령
눈속에 푹 파묻힌 구조목은 몇 키로가 남았는지, 몇 시간이 걸릴지
마음을 비우고 의식의 흐름마저 멈추라고 요구한다.
그래도 걸어온 길을 되짚어본다. 본다기 보다 마음에 꼭꼭 새겨넣고 싶다.
<동엽령>
햇살이 따스한 데크에 앉아 컵라면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백암봉 가는 길은 체력소모가 많기 때문이다.
병곡방향의 고요한 풍경
백암봉 가는 길, 약간의 인내가 요구된다.
가끔은 뒤를 돌아보며 고통자체도 즐기면서 오른다.
백암봉(송계삼거리)에서 뒤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역시 겨울 덕유의 품은 넓고 강해보인다.
안성방향의 풍경
횡경재로 발걸음을 돌리니 하얀 눈을 이고 선 중봉이 말을 건넨다.
"오늘은 나 안 만나고 가?"
"갔다 와야지 했는데 마음이 변했수. 다리가 너무 아프네. 눈꽃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예~~끼! 잘~~~~~가게."
"..............?"
'금오신화'를 창작한 김시습의 법호가 雪岑(설잠)이라 했다.
눈 덮힌 봉우리라는 뜻의 설잠(雪岑), 중봉이 그의 법호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냉소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그의 칠언율시 중의 일부
꽃이 피고 지는 것 봄이 무슨 상관하랴
구름이 가고 오는 것 산이 무어 다투리요
세상 사람들이여 내 말 새겨 들으시오
즐겁고 기쁜 일들 한평생 가지 않나니
대간길인 횡경재까지는 두 어개의 봉우리를 더 넘어야 한다.
뒤돌아본 백암봉과 중봉
앙상한 신갈나무사이로 눈위의 발자국이 꼬불꼬불 이어진다.
귀봉(1390m)에 오르니 멀리 지봉(못봉)과 대봉, 갈미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음에 이어가야할 구간이다. 갈미봉에서 대간은 좌측으로 빠지고 환종주는
직진하여 호음산-수승대로 이어진다.
<횡경재>
위험한 송계사 하산 길
횡경재를 내려서니 바로 급경사 빙판길이다. 계단은 물론 그 흔한 로프도 한 가닥
매어있질 않다. 이곳이 국립공원이 맞나 싶을정도로 안전에 대한 관리가 전무하다.
요즘들어 조심해도 잘 넘어지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계곡에 내려서기
전까지 1km가 넘는 구간이 빙판으로 이어졌다 끊어졌다 반복된다. 삐죽하고 모난
돌들이 많아 조금만 방심하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간이다.
송계계곡에 내려서자 등로가 부드러워지고 물소리가 조용조용 들리는 것이
이제 다 왔구나 싶다.
<송계탐방안내소>
주차장에 내려서니 때마침 시외버스가 한 대 정차해 있다. 택시를 부를까
했는데 다행이다. 기사님께 몇 시에 출발하시냐고 물으니 20분 후, 1시 40분
에 출발한다고 한다. 황점에 가야된다고 했더니 시간표를 보더니 위천에
내려서 황점가는 버스를 갈아타면 된다고 한다. 행운이다.
승객이라고는 나와 시골 할아버지, 그분의 며느리로 보이는 젊은 부인이
전부다. 위천면 정류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황점가는 버스가 마주온다. 기사
님이 나보고 옮겨타라며 정류장도 아닌데 손짓을 하여 세워주신다. 기사님
께는 작다면 작은 일상적인 친절이었겠지만 난 무척 고맙고 흐믓했다.
덕유산 환종주 지도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구간별 산행기록
산행시간 : (황점-송계) : 17.9km / 7시간 50분
05:30 .................황점탐방안내소
06:53 ...................삿갓재(대피소)
07:56 .............................무룡산
09:30-09:50 .....................동엽령
11:02 ..............................백암봉
12:12 ..............................횡경재
13:20 ..................송계탐방안내소
차량이동거리 : 서대구 - 거창 - 황점 : 110km (1시간 30분 소요)
차량회수 : 대중교통 (송계발 13:40 - 북상 13:50 / 1,300원 - 거창행)
(거창발 - 북상도착 13:50 - 황점 14:20 / 1,800원 / 거창서흥여객)
택시 이용시 : 위천개인택시 055-943-0300
ㅡ 끝 ㅡ 감사합니다
'일반산행 > 덕유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삿갓봉 (0) | 2013.01.27 |
---|---|
덕유산에서 대간꾼을 만나다 (0) | 2012.06.10 |
하늘속의 정원 덕유산 (추억의 산행기) (0) | 2011.07.27 |
유혹의 꽃물결 '덕유산 원추리' (0) | 2011.07.23 |
덕유산 산행안내도 (0) | 2010.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