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꽃물결 '덕유산 원추리'
2011. 7. 17. 꼭지와 둘이서
삼공리 - 백련사 - 향적봉 - 중봉 - 향적봉 - 칠봉 - 삼공리
(약 18km / 02:00 - 12:00)
덕유산은 사계절 아름다운 산이다. 겨울에는 설경이 좋고, 봄, 여름, 가을이면
온갖 야생화가 화원동산을 이루어 우리를 유혹한다. 특히 7월은 원추리가 추리하고
노란 바람에 일렁이며 산꾼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거기다 운해까지 가세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착각이어도 좋다.
덕유산 운해는 해뜨는 시간대가 아니면 쉽게 만날 수가 없다. 운해를 보려면
무박산행을 각오해야 하고 일출시간에 맞추어 향적봉에 도착해야 한다. 물론, 전날
대피소에서 느긋하게 자고 일출을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겐 그런 여유가 없다.
덕유산을 많이 다녔지만 제대로 핀 원추리를 구경하지 못했다. 지나온 산행기를
뒤적여보니 아니라다를까 한번도 원추리가 절정인 7월에 산행을 한 적이 없었다.
마침 남부지방은 주말에 장마가 끝난다는 기분좋은 소식이다. 떠날 채비를 한다.
산에 드는 마음만은 늘 새롭고 설레이지만 이제는 몸이 잘 따라주질 않는다.
밤12시에 집을 나서 삼공리에 도착하니 새벽2시다. 달빛이 밝아서 랜턴을 켜지않고
걸음을 옮기는데 반딧불이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여기저기 날아오르며 길을 밝혀
준다. 삼공리에서 백련사 가는 길은 지루하지만 걸을 때마다 색다른 정취와 아름다
움이 묻어난다. 달빛이 밝아 구천동 계곡의 청아한 물소리가 더욱 정겨운 밤이다.
우거진 숲사이로 언듯언듯 비쳐드는 밤하늘, 초롱초롱한 별빛이 쏟아져 내린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맑은 밤하늘이다. 도심속의 하늘은 별빛을 잊은지 오래다.
둥글고 환한 달그림자가 우리를 앞지른다. 구천폭포를 지나니 밤의 향연은 끝이나고
백련사의 고요함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백련사에서 향적봉 오르는 길은 언제나
힘든 구간이다. 새벽하늘을 뚫고 떠오르는 태양의 아픔도 이러할까...
드디어 향적봉이다.
산장에서 올라온 산객 서너명이 시시각각 변하는 새벽 하늘빛에 취하고 있었다.
하늘은 붉게 달아오르고 태양은 첩첩이 막아선 연봉들을 넘으며 얼굴을 내민다.
꿈결 같았던 백두대간 능선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저곳은 어디 쯤일까? 덕유삼
봉산? 소사고개? 대덕산? 그 어디 쯤일 것 같다.
망망대해에 섬처럼 떠 오른 가야산과 수도산줄기가 빚어내는 풍광은
오늘도 우리에게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밤새도록 달려온 피곤함도, 백련
사의 가파른 돌길의 무거움도 이제는 새벽기운에 모두 묻혀져 갈 뿐이다.
비몽사몽간에 따라나선 꼭지의 마음을 위로라도 하듯이 꼭지 뒤로는 거대한
고래가 막 튀어오늘 것 같은 운해가 파도처럼 일렁이고, 햇살은 풀잎에 파고들어
요염한 자태를 선보인다. 이렇듯 자연은 시시각각 저 혼자만의 아름다움을 뻠낸다.
불과 몇 분사이에 운해가 하늘로 솟구치며 요동을 친다.
거창 읍내는 운해속으로 잠겨 들었다. 속세의 고달픔도 애틋한 사랑도 모두 모두...
태고적 세상도 이러했으리라. 멀리 오도산은 인간의 안테나를 세워 쫑긋거린다.
두무산이 잠에서 깨어나고 의상봉은 길게 기지개를 켠다. 하늘과 땅의 경계, 옥황
상제에게 버림받은 장군봉과 미녀봉의 전설이 새삼스럽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직은 원추리의 꽃잎이 채 벌어지지 않았다.
등로에는 이슬에 젖은 원추리와 솜털처럼 부드러운 터리풀이 꽃길을 열고
하늘을 찌르는 범꼬리 넘어로 무룡산에서 서봉으로 이어지는 덕유주능선은 황홀하기만 하다.
어느 시인의 독백처럼 알알이 들어와 박힌 노란 보석같은 원추리, 모질게
추웠던 올겨울의 혹한을 견디고, 숨막히는 긴장마 속에서도 이만한 꽃을
피운 원추리가 대견스럽다.
하늘에 닿은 범꼬리
오늘은 멀리 지리산도 시야에 들어온다.
다시 향적봉으로 돌아와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핀 뙤약볕의 비탈길을 내려가 칠봉으로 향한다.
조망없는 폐헬기장 칠봉(1307m)을 내려서면 급경사길이다. 6년만에 다시찾은
이 길은 그때보다도 더 원시적인 숲길 같다. 급경사와 너덜구간이 많아서 꼭지가 무릎이
아프다며 절둑거린다. 개방되긴 했으나 등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서 아쉽다.
칠봉약수터에 도착하니 바위틈에서 뿜어져
나오는 석간수가 쉴새없이 흘러내린다. 한 바가지 떠서 목을 축이니 온몸이 짜릿하고
상쾌하다. 해발 1100m에 위치한 바위틈의 샘물이라 이가 시릴정도로 차갑다. 예전부터
만병에 효염이 있다고 알려진 칠봉약수다. 잠시 휴식하며 산행의 피로를 덜어낸다.
인월담에 내려서니 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한여름의 싱그러움을 토해낸다.
일상의 세속, 산에 대한 우리의 마음은 한결같은데 산은 언제나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낯익은 풍경도 하나같이 새롭게만 느껴지고 그러한 것들이 우리를 감동
시키고 유혹하며 산으로 부르는게 아닌가 싶다.
ㅡ END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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