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아름다운 덕유산... 백두대간6 (육십령-삿갓재)
2007. 10. 14. (일) 구름조금
총 산행시간 : 9시간 45분 (16.73km)
산행개요
육십령에서 빼재로 이어지는 대간길은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크고 넉넉하다는 덕유산의 품속입니다.
덕유산은 겨울에는 설경과 눈꽃으로, 봄과 여름에는 들꽃들의 향연으로 천혜의 산상화원을 이루며,
가을에는 구천동 계곡을 곱게 물들이는 단풍과 높은 하늘사이로 막힘없이 펼쳐지는 조망이 좋아
사시사철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산이지요.
80리 길을 아우르는 육십령에서 빼재(신풍령)구간은 하루에도 끝낼 수 있지만
이번만은 느긋하게 야간산행을 배재하고 꼭지와 함께 두 구간으로 나누어서 진행 합니다.
그동안 덕유산은 종주를 한답시고 할미봉구간을 야간에만 진행하여 조망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일출시간에 맞추어 육십령을 출발, 조망이 뛰어난 할미봉에서 지나온 대간길을 뒤돌아보고
또 다가서면 설수 록 도망간다는 삿갓봉까지 대간산행을 이어갈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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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육십령
봄은 아침이 아름답고 가을은 저녁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육십령에서의 풍경은 아침이 더욱 아름답다.
예전에 종주할 때는 거의 새벽 2시나 3시, 야간산행으로 육십령을 출발해 서봉에 도착하면
일출이 시작되곤 했는데 그렇게 하다 보니 할미봉에서는 조망한번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할미봉은 어떻게 생겼으며 그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어떠할까?
잔득 기대감을 안고 육십령을 출발한다.
육십령에서 할미봉가는 길은 편안한 오솔길이라 발걸음도 가벼운데 벌써 구절초까지 피어서 객을 반겨준다.
능선에는 푸르기만 했던 풀잎도 시들하고 상수리나무와 단풍나무는 고운색깔이 물들기도 전에
이미 말라서 떨어지고 있으니 등로에 쓸쓸히 쌓이는 가을빛이 처연하다.
가을은 이별의 연습이며 떠남과 비움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고 하니
식물들도 사색에 잠기는 계절이 아닌가 싶다. 가을은 우리의 마음도 흔들어 놓아
조그만 일에도 가슴이 설레이고 감격해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환상적인 장계면 명덕리의 아침풍경
▲가야할 할미봉
▲ 할미봉을 오르며...
할미봉을 오르며 가끔 트이는 조망 따라 눈길을 멈추면 장계 명덕리와 오동리의 풍경이 정겹기만 하다.
그 뒤로는 호남의 산군들이 앞 다투어 자신을 드러내며 병풍처럼 둘러친다.
벼들이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들판과 산아래 옹기종기 모인 시골마을을 감싸 안으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아침 안개, 산골짜기 골골 가득 메우며 고요히 일렁이는 하얀 운무는 더욱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리는 늘 이러한 풍경들을 꿈꾸며 산행을 한다.
평소에 느리기만 하던 꼭지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무척 가볍다. 어쩌면 할미봉에 대한 기대감 때문일 수도 있다.
산초보이던 4년 전 겨울, 할미봉에 올라섰을 때 <작업중>이라는 조망안내판이 기억날 뿐
특별한 감동은 없었다. 그리고 빙판길이 되어있는 로프구간에서
“국립공원에 뭐 이런 길이 다 있노.” 투덜대던 꼭지의 투정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그래서 꼭지는 이번에는 할미봉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꼭 보고 싶다고 한다.
할미봉
할미봉은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망이 압권이다.
육십령에서는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 않아 좋고 뒤를 돌아보면 막힘이 없어 가슴속까지 후련해진다.
정상에 서면 마치 360도로 동서남북을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육십령너머로 지나온 깃대봉과 운무에 휩싸인 영취산과 백운산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장안산이 오똑하다.
좌로 고개를 돌리면 황석산의 모습이 볼록볼록 특이하고 그 뒤로 멀리 천왕봉과 중봉,
지금까지 걸어온 대간의 분수령이 옅은 운무에 둘러싸여 환상적인 모습으로 시야에 들어온다.
▲ 서상방향의 '며느리할미봉'이라 불리는 작은 할미봉
▲할미봉에서 인증샷
할미봉은 덕유산 국립공원에 속하고 백두대간상에 있지만, 그 빼어난 조망에도 불구하고 늘 외롭다.
지나는 대간꾼이나 종주꾼 외에는 가을이 되어도 찾는 이가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겨울철에 한번 눈이 내리고 나면 이곳은 북향이라 봄이 될 때까지 눈이 녹지않아 빙벽으로 변한다.
비록 로프가 있긴 하지만 아이젠이 없으면 내려서기 힘들 정도다.
▲ 가야할 서봉
▲ 겨울철에는 빙판이 되어 악명을 떨치는 할미봉 로프구간
겨울 눈꽃 산행 때는 몇 대의 관광버스가 육십령에서 무더기로 산꾼들을 풀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빙판의 로프구간을 내려서기위해 1~2시간 차례를 기다리다보면 짜증만 더해
산행을 포기하고 다시 뒤돌아가는 분들이 많을 정도라고 한다.
아름다운정경들, 그 황홀함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로프구간을 내려선다. 겨울에는 손발이 벌벌떨리는 곳이다.
여전히 흔한 나무계단이나 철사다리도 설치되어 있지 않고 로프만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로프구간을 내려서면 편안한 오솔길이 이어져 휘파람이 절로 나게 한다.
10분쯤 지나면 곧이어 나타나는 작은 암봉, 손에 잡힐 듯이 펼쳐지는 서봉을 향한 조망이 일품이다.
뒤돌아보면 가을색이 완연한 할미봉이 당당한 모습으로 주위의 산군들을 거느리는 모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길이 애매하다.
▲ 가야할 서봉과 남덕유산
▲'아침이 아름다운 덕유산' 그 진면묘가 펼쳐진다
암봉에서 직진하면 바위를 내려서야 하는데 꽤 까다롭고 위험하다. 로프도 없다.
암봉 오르기전 우측으로도 우회하는 길이 있으나 이미 지나쳤기에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리본이 많은 좌측으로 눈길이 가게되는데 길은 비스듬한 바위 사면으로 붙어서 이어진다.
그 아래는 약간 경사가 있긴 하지만 끝이 가늠이 안되는 절벽이다.
잘못하여 미끄러지면 굴러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중상내지는 사망에도 이를 수 있는 험로다.
“으~~악.”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에 놀라 뒤돌아보니
꼭지가 엉거주춤 앉아 발목을 잡고 있다. 그 아래는 절벽, 바로 조금 전 그곳이다.
꼭지가 발이 엇갈려서 미끄러질 뻔했는데 겨우 멈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아래로 굴러 떨어졌으면 큰 부상을 당할 뻔했다.
꼭지 왈 “헬기를 부르고 신문에 한 페이지 날 뻔했는데...”
그래도 여유가 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꼭지도 무척 놀란 표정이다.
할미봉에는 할미귀신이 있다고 하던데 오늘은 꼭지를 사지에서 구해 주었나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곳을 벗어난다.
▲헬기장을 오르며 뒤돌아본 풍경... '저 길을 우리가 걸어왔다니'
교육원 갈림길을 지나 헬기장에 올라서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뒤돌아보는 조망이 너무나 아름답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싫지 않은 풍경들...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지나온 길이기에 더욱 그렇다.
아직도 엷은 운무사이로 산봉우리들은 꿈틀대며 살아 움직이고 있다.
실안개 피어오르는 아담한 시골마을과 농촌들녘의 풍경...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풍요와 고요를 느낀다.
물질적인 부와 육체적인 쾌락도 우리 인간사에 필요한 존재들이지만 그들의 가치는 잠깐이다.
하지만 오늘 얻어내는 이러한 마음의 풍요는 오래오래 가슴에 남을 것이다.
▲멀어져 갈 수록 풍경은 더 아름답다.
▲은은한 안개 속의 서상마을과 멀리 할미봉 바위지대가 시야에 들어온다
▲ 이제 1시간 거리로 다가오는 서봉
▲ 벌써 가을인가... 잎새는 단풍이 들었네
▲ 서봉 아래에서 또 뒤돌아보고
10시간의 감동... 남덕유산
서봉의 오름길은 고통과 인내를 요구한다. 드문드문 키작은 산죽이 위안을 주고
하얗게 피어난 구절초와 보라색의 산오이풀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반가워한다.
고도 1500의 서봉사면에는 이미 단풍이 물들어 물감을 뿌려놓은 듯 화려하다.
힐끗힐끗 지나온 할미봉을 뒤돌아보며 약수터 100m 이정목을 올라서니 바로 서봉이다.
겨울에는 칼바람에 감히 서있기도 힘들었지만 오늘은 느긋하게 앉아 시원한 바람에 취한다.
정오가 가까운 시간이라 엷게 퍼져있던 안개는 사라지고 낮게 드리워진 구름과
시야를 방해하는 가스층 때문에 조망은 옅은색으로 은은하게 펼쳐진다.
▲가을의 전령 산오이풀
▲ 덕유산 서봉
▲가야할 길... 삿갓봉과 무룡산으로 이어지는 대간의 장쾌한 마루금
▲ 남덕유가는 길의 단풍터널
철계단을 내려서니 능선길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어가고 있다.
남덕유산은 지리의 반야봉처럼 대간의 마루금에 벗어나 있어서 그냥 지나치기 쉬우나
조망이 너무나 좋은 곳이다. 오늘처럼 날씨가 좋은 날 힘들다고 모른 척 지나갈 수가 없어 서둘러 남덕유산에 오른다.
불과 10분여 발품을 팔면 10시간의 감동이 가슴에 남게 되는 곳...
예상했던대로 그 감동은 파도처럼 밀려와 황홀한 그림이 되어 머릿속을 채운다.
지금까지 멀리서 그 윤곽만 보아왔던 월봉산과 금원산으로 이어지는 산마루가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과 옅은 구름에 싸여 아늑하고 아름답다.
이곳에서 바라본 할미봉은 부드럽기만 하고 마주하는 서봉은 옹골차고 듬직한 모습이다.
겹겹한 작은 봉우들을 앞세우고 뾰족이 솟아있는 삿갓봉과 그 뒤로 무룡산, 시루봉이 선명하고
구름사이로 희미하게 비쳐지는 덕유산 향적봉은 시야에서 아른하다.
▲ 남덕유산에서 바라본 삿갓봉과 무룡산
▲ 남덕유산에서 바라본 월봉산과 금원산방향
▲ 뒤돌아본 서봉
▲지나온 할미봉 방향의 풍경들...
가야할 삿갓봉 방향
움직이는 삿갓봉
남덕유산에서 삿갓봉가는 길은 4km에 불과하지만 굉장히 멀게 느껴지는 구간이다.
오늘은 예전에 경험한 터라 마음을 비우고 걷는다. 가을빛이 완연한 단풍터널과
지나온 서봉도 오후의 눈부신 햇살에 희미하게 모습을 보이며 용기를 보내고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걸어가는 꼭지의 뒷모습이 나에게는 위안이 되고 힘이 된다.
가슴적시는 행복감은 산행할 때 늘 꼭지의 뒷모습에서 발견하고 스스로 흐믓해한다.
삿갓봉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꼭지의 힘들어하는 발걸음을 볼 때는 안쓰럽기도 하지만 산행은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연이 그 고통을 어루만져주고 그것을 이겨내는 자신에게서
또한 커다란 쾌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월성재가는 길..
▲ 월성재에서 엿보는 서봉
▲ 월성재를 지나 첫 봉우리에서 바라본 삿갓봉
삿갓같이 생긴 봉우리를 7~8개 넘어야지 진짜(?) 삿갓봉에 오를 수 있다.
3년전에 해병대와 육십령에서 삼공리로 종주할 때 귀신 잡는 해병도 삿갓봉가는 길은 힘들다고 투덜댔다.
몇 개의 삿갓 같은 봉우리를 넘고 나서 “저기가 삿갓인가?” 하고 물으면 “아니다.”
그 봉우리를 넘고 “저기가 삿갓인가?” 또 물으면 “아이다.”
또 한 봉우리를 넘고 “그럼 저것이 진짜 삿갓봉이겠구나.” 이제는 틀림없다는 듯 당당하게 물었지만
그때, 나의 대답은 또 “아이다.” 였다. 해병대 왈 “우쉬~~ 삿갓이 왜 자꾸 도망가,”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삿갓봉은 ‘메롱~~@’ 하며 바로 그 뒤에 숨어있었다.
▲화려한 덕유산의 가을빛
▲드디어 가야할 삿갓봉이 지척이다
대부분의 산님들이 이 길을 지나면서 그렇게 느낀다고 한다.
‘다가가면 갈 수록 삿갓봉이 계속 삿갓을 눌러쓴 채 도망가고 있다’ 고
꼭지에게 그 얘기를 해줬더니 아예 마음을 비우고 걷는다.
그러나 마지막 봉우리를 남겨놓고는 “저기가 삿갓인가.?” 하고 묻기는 했으나.
꼭지는 별로 힘들지 않고 삿갓봉에 올라 온갖 폼을 잡으며 즐거워한다.
멋진 조망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감동에 겨운 행복을 느낀다.
우리의 일상도 그럴 것이다. 가을이 주는 의미처럼 버리고 비울 줄 안다면 험난한 산마루라도 가볍게 오를 것이고
이 각박한 세월의 여행을 통해 고단함 후에 찾아오는 달콤한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지나온 가짜 삿갓봉과 남덕유산과 서봉
▲ 삿갓봉에서 바라본 무룡산과 멀리 향적봉
▲오늘의 종착지 삿갓골재 대피소
그후
삿갓재대피소에 내려왔더니 컵라면을 팔지 않아 과자 몇 개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있는데
우리보다 3시간이나 늦게 육십령을 출발하셨다는 준족의 산님 두 분을 만나 함께 황점으로 하산한다.
삿갓재에서 황점까지는 4.2km, 하산 때는 보통 1시간이 소요된다고 했으나
예약한 택시 때문에 너무 서둘러 내려왔는지 채 1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에 진행하는 대간길에는 또 어떤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 끝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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