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대첩 그 역사속으로... 백두대간 3 (여원재-복성이재)
2007. 09. 02. (일) 흐리고 비
총산행시간 : 10시간 20분 (21.48km)
산행개요 (여원재-고남산-복성이재)
여원재에서 복성이재에 이르는 운봉고원은 목기와 벅수, 판소리로 유명한 곳이다.
백두대간과 지리산 서북능선이 운봉을 감싸고 있어서 운성(雲城)이라고도 하며
‘운성대장군’이라는 벅수(돌이나 나무로 만든 장승)가 여원재에 세워져 있다.
목기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남원목기는 특유의 향기와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양,
단단한 나무재질로 오래전부터 운봉의 특산품으로 곱혀왔으며 바래봉을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에 비유해 이름 지은 것을 보아도 목기의 고장임을 짐작할 수 있다.
황산 아래에 있는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은 고려말 이성계의
황산대첩의 배경마을로도 유명하지만 국악인들에게는 판소리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나누어지는 동편제와 서편제, 그중 운봉은 동편제의 뿌리다.
동편제 창시자로서 판소리계에서 최고의 칭호인 ‘가왕(歌王)’으로 불리는 ‘송흥록’ 명창이
이 비전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귀곡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등골을 오싹하게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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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재의 유래와 이성계의 황산대첩
산행전날 토요일,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비는 일요일, 월요일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좋은 소식은 아니다. 그렇다고 예정된 대간 길을 멈출 수는 없는 일
일요일 새벽, 3시쯤 일어나 산행준비를 하니 다행히 빗줄기가 잦아든다.
자주 이용하는 24시 김밥집에 들러 아침에 먹을 김밥을 사서 4시에 대구를 출발한다.
지난번에 성삼재에서 여원재까지 20여km를 걸렸더니
“죽네 사네, 대간이 사람 잡네.” 어쩌고저쩌고 하던 꼭지가 호우특보가 내린 일기예보에도
아랑곳 않고 순순히 따라나선다. 신기한 일이다. 대간이 정말 사람 잡으려나보다.
지리산 I.C를 빠져나오니 비는 거짓말처럼 뚝 그쳤지만 낮게 드리워진 먹구름이 언제라도 비를 퍼부울 기세다.
우중산행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비가 그쳤으니 다행이다 싶다.
06:10 여원재 고갯마루에 도착해 버스정류소 뒤쪽에 있는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산행준비를 한다.
오늘 산행들머리인 여원재에 대하여 잠시 정리해본다.
여원재는 24번 국도가 지나가는 백두대간 남쪽에 있는 큰 고개다.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끓임 없이 행해지고 있을 때 고갯마루 주막에 살던
젊고 아리따운 주모에 얽힌 슬픈 전설은 지나는 대간꾼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고개를 넘나드는 길손들에게 밥과 술을 파는 신세였지만
“어찌 내가 왜구에게 몸을 빼앗기랴.” 하며
왜놈이 만진 왼쪽 젖가슴을 스스로 오려내고 자결했다고 한다.
왜구의 노략질과 약탈이 극심했던 1380년 우왕 6년
양광(경기.충청), 전라, 경상 삼도도순찰사로 임명된 이성계가 남원에서 배극렴과 합류 왜구의 토벌에 나섰다.
팔량치를 넘어온 불사신으로 소문난 왜장 아지발도를 상대하기 위해 여원재를 넘을 적에
백발의 여인이 나타나 “내 원수를 갚아~~ 주~~.” 하며 이렇게 저렇게... 전략을 가르쳐주었다.
이성계가 깜짝 놀라 눈을 뜨니 꿈이었다.
그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아지발도는 나이가 어렸지만 키가 7척에 힘이 장사라 온몸을 무거운 무쇠갑옷으로 두른 탓에 불사신과 같았다.
그를 죽이려면 화살을 이용해 얼굴의 급소를 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름도 그의 본 이름이 아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이 소문에 소문을 더하면서 만들어졌다는 설이다.
‘아지’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이고 ‘발도’는 용맹하다는 뜻을 지닌 몽고말이라고 한다.
황산에 당도한 이성계는 꿈 속에서 백발의 여인으로부터 어떤 계시를 받았을까?
날이 저물고 그믐밤인데다가 피아의 분별이 어려워 싸움을 할 수가 없다. 바로 그것이었다.
당연히 아지발도도 방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처럼...
잠시 망설이던 이성계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지라 하늘을 향해
“천지신명이시여~~ 이 나라 백성을 굽어 살피시어 달을 뜨게 해주소서.” 하고 간절히 기도를 올린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감동했는지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칠흑같은 밤하늘에 어디서 솟았는지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대낮같이 비추어 주었기 때문이다.
깜짝 놀라는 적장 아지발도의 얼굴이 달빛에 훤히 빛났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부원수 통두란으로 하여금 먼저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게 했다.
그 화살이 어김없이 투구를 맞히자
아지발도는 벗겨지려는 투구의 끈을 입으로 잡으려고 얼른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신궁 이성계의 화살이 이번엔 아지발도의 입속으로 들어가 목구멍을 관통했다.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도륙하던 왜구의 적장이 죽는 순간이었다.
결국 아군보다 왜구들의 수가 10배나 많았지만 모두 섬멸되었고 아지발도가 흘린 핏자국이
지금도 황산 광천에 있는 피바위에 남아 있으며 이것이 유명한 황산대첩인 것이다.
이때 이성계장군이 달을 끌어 올렸다하여 인월(引月)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꿈에 나타난 백발의 여인이 주모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 후 태조 이성계는 고갯마루에
‘여원’이란 사당을 짓고 그 여인의 넋을 달랬고 후세 사람들은 이 고개를 ‘여원치’라고 불렀으며
주민들은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준 제비가 넘나들던 고개라 하여 ‘연재’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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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0 여원재 그 어디에도 그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벅수의 구석진 표정만이 쓸쓸하고
들머리에는 금방 산꾼들이 한 무리 지나간듯한 발자국이 선명하다.
'무지개산악회⇒'라는 화살표 안내표시가 보이고 길이 반질반질하게 잘 나 있어 이 발자국 따라가면
오늘 알바걱정은 없겠구나 했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시작부터 알바하게 될 줄이야.
초입에 이르자마자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마을로 연결된 시멘트도로가 나타나고
밭둑 옆을 지나며 어디로 가야하나 두리번거리는데 사진으로 본 기억이 떠올라 좌측 묘지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니라 다를까 리본이 희미하게 보여 올라선다.
동네주민이 두 분 지나가시며 우리의 눈치를 보더니 그쪽으로 가면 된다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신다.
묘지를 지나니 또 임도수준의 질퍽한 도로가 나오는데 발자국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직진한다.
안부에 올라서니 밤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아래에는 밤송이가 수북이 떨어져 있다.
밤알이 크고 통통하여 ‘오~! 이게 웬 횡재냐’ 싶어 꼭지와 대간 길을 접어두고 스틱으로 밤송이를 까서
호주머니에 꾹꾹 집어놓고 계속 시멘트 길로 진행하는데 막다른 농장으로 이어지더니 길이 없어지고 만다.
그 많던 리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초입부를 지나쳐 온 것이다.
“우잉~~@ 누가 리본 다 걷어갔나 보다.” 중얼거리며 애서 태연한 척 해보지만
꼭지 앞에서 길 잃은 대장(?)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 대간은 전봇대가 서있는 곳에서 좌측 묘지 방향
▲고남산 가는 길
▲ 운봉방향
‘대간 길은 50m이내에 리본이 보이지 않으면 무조건 백하라고 했다.’ 아차 싶어 다시 뒤돌아오니
숲 속에 리본이 수두룩 걸려있다. 숲 속으로 연결된 리본은 보지 못하고
도로가에 붙어있던 리본만 보고 도로따라 직진했던 것이다.
발자국만 따르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과 순간의 방심이 알바를 제공한 것이다.
왜장 아지발도도 황산에서
“이 칠흑 같은 밤에 누가 나를 쏠 수 있으랴.”
그러한 방심과 안이한 생각으로 목숨을 잃고 만 것이 아니던가.
대간에 있어서도 ‘방심은 절대 금물’ 이라는 큰 교훈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알바덕분에
산행내내 알밤을 까먹으며 걸을 수 있었으니 뭐 이런 알바는 매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30분정도 시간을 소비하고 나서 장치를 지나니 서서히 고도가 올라가기 시작하고
보이는 묘지들마다 거의 말끔하게 벌초가 되어있고 드문드문 예초기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정겨운 시골풍경과 박무속에서도 멀리 운봉읍내가 평화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키큰 억새와 잡목이 우거진 숲길을 지날 때는 이슬 때문에 온몸이 젖어들지만 운치있는 소나무숲길이
위안을 주고 평균고도 또한 600정도를 유지한 채 능선이 고만고만 이어지고 있어 걷기가 좋다.
▲ 대간길 한복판에 있지만 작은 다리의 배려가 정겹고 망자의 코고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묘지
▲ 고남산 로프구간
▲ 계단위에 올라서니 잠시 서쪽으로 하늘이 열리고
대간 길 한복판에 있는 잘 다듬어진 묘지에서 잠시 휴식하고 로프구간을 지나 목계단을 올라서니
고남산 정상부, 통신안테나가 정상을 선점하고 있다. 커다란 정상석은 그 조금 아래에 있고
옛날의 봉화불을 올리던 봉화대 대신에 엄청 큰 송신탑이 세워져 옛날의 통신역할을 해주고 있다.
정상에 서면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조망이 좋다고 했으나
오늘은 운무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서둘러 정상을 내려서니 우거진 딸기나무와 잡목이 진행을 방해한다.
곧 이어 송신탑으로 연결된 시멘트도로가 나타나고 두세 번 도로를 가로지르니
운치있는 소나무숲길과 지루한 잡목길이 번갈아가며 매요리까지 1시간 40여분 길게 이어진다.
내려가는 길은 대부분 진흙탕이라 미끄러워서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러나 날씨가 덥지 않아서 그런지
꼭지가 힘들다고 보채지 않고 잘 걸어서 이제는 대간에 적응해 간다는 생각이 든다.
정에 취하고 막걸리에 취하고... 매요휴게실의 할매
10:50 매요리에 도착해 리본따라 동네복판을 가로지르니 마을이 오지마을 답지 않게 제법 산뜻해 보인다.
마을회관을 지나니 좌측으로 소문으로 듣던 ‘대간꾼의 요람’ 매요휴게실이 반겨준다.
간판이 세워져있는 휴게실콘테이너 문이 잠겨있어 행여 장사를 안 하시나 걱정했는데 안쪽에서
할매(신순남 할머니 72세)가 인기척에 얼굴을 내미시는데 나이보다 훨씬 깊은 주름에서
그 옛날 보릿고개를 넘으며 자식을 키웠을 세파의 흔적이 묻어난다.
아들 셋에 딸 넷, 칠남매를 두셨다는 할머니
남원 ‘주생’에서 왔다고 ‘주생땍’이라 불리는 할머니는 일곱 살 때 매요리로 이사 왔으며
21살에 동네 총각과 결혼했으나 중년에 남편을 여의고 혼자되신 분이다.
하지만 대령이신 아드님이 할머니가 외롭지 않도록 대간꾼과 동무하며
노년을 보내시라고 이곳에 휴게실을 마련해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할머니는 비가오나 눈이오나, 추우나 더우나, 밤 낮 아무 때나 대간꾼이 들이닥쳐도
귀찮아하시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반겨주시는 대간꾼 모두의 할매다.
▲ 매요리 마을입구 끝 지점이 유치재
▲ 매요휴게실 입구의 들쭉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대간꾼들의 사연들..
▲ 콘테이너로 된 휴게실과 안채
“할매! 라면이나 두 개 끄래 주소.”
할머니 성이 ‘신’씨라서 그런가 ㅋㅋ~ 할머니가 끓이는 라면 역시 ‘신’라면이다.
대간을 제대로 탓느냐 아니냐는 매요할매 막걸리를 먹어봤냐 안먹어 봤냐로 알아본다고 하니
막걸리를 안 먹고 갈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랬다간 고수님들 “너 다시 돌아가서 먹고 와라.” 하면
갈 길이 바쁜데 꼭지델고 또 여원재를 넘고 넘어 다시 와야 하기 때문이다.
“할매! 막걸리도 한 병 주소.”
“우리 이제부터는 대간 길 막걸리 힘으로 가자.” 하며
대한민국에서 제일 맛있다고 소문난 매요막걸리, 꼭지와 주거니 받거니 한 병을 홀랑 비운다.
막걸리는 별로 독하지도 않고 순하고 부드러워 듣던 대로 맛이 좋았다.
하긴, 대간 이등병(?)이 먹는 막걸린데 그 맛이야 오죽하랴.
“도시락 갖고 왔으면 이리 줘, 밥 담아 주꺼시께.” 처음에는 할머니의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
벙벙하다가 다시 되물은 후에야 밥을 담아 주시겠다는 그 뜻을 알고
“허허~ 괜찮심더 복성이재까지만 가면 되는데 뭐.”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지만 코끝이 찡해진다.
할매의 김치 맛도 최고라고 들었는데 적당하게 삭은 배추김치와 열무김치
역시 꿀맛이라 밥도 한 공기 달라하여 라면에 말아먹고는
“할매! 퍼뜩 진부령 갔다가 막걸리 먹으러 다시 내려올끼까네 오래오래 사시이소.” 하고 인사를 드리니
“앙~ 지나가는 산꾼들 다 나보고 죽지말고 막걸리 팔아라 카이 이 노릇을 워쨔.”
“그래도 우리 다시 내려올 때 가지 오래오래 사시이소.”
“그랴~ 그때 오면 라면 더 맛있게 끄려 줄테니께 꼭 와~~.”
휴게실입구에 서 있는 들쭉나무는 우리의 주고받는 얘기들을 묵묵히 들으며 지나는 바람에 고개를 흔든다.
나뭇가지에는 오고가는 대간꾼들이 걸어놓은 리본들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주렁주렁 매달려
그 사연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라 서로 정담들을 나누라며 우리 것도 하나 걸어두고
휴게실을 나서니 어쩐지 가슴이 허전해진다.
▲ 지금은 폐교된 운성초등학교 1
▲ 운성초등학교 2
▲ 사치재가는 길에 바라본 운봉방향의 조망
▲ 사치마을과 88고속도로
▲ 사치재를 지나 불탄지역을 오르며 뒤돌아본 대간능선
▲88고속도로 지리산휴게소와 인월방향
예전엔 비교적 규모가 컷을 폐교된 운성초등학교 담장 따라 교회 앞을 지나 유치재를 넘는다.
이곳에서 사치재까지는 1시간 20여분 걸리는데 좌측으로는 사치마을과 88고속도로가 시야에 들어오고
우측으로 700m정도를 올라가면 지리산휴게소가 있다. 차량통행이 뜸한지라
지하도대신 마루금의 고속도로위를 바로 횡단하여 산불지역의 경사면을 오른다.
600봉 헬기장을 넘어서니 고만고만한 능선이 이어지는데 억새와 키 작은 잡목사이로 조망이 트이고
새맥이재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마루금은 서서히 호흡을 가쁘게한다. 운무 때문에 어디가 시루봉인지
알지 못한 채 기암(남근석으로 추측됨)을 지나 올라서니 아막성터의 작은 돌탑이 반긴다.
아막성은 운봉고원을 사이에 두고 삼국시대부터 신라와 백제사이에 격렬한 영토분쟁이 벌어지던 곳이다.
백제는 아막성이라 불렀고 신라는 모산성이라 불렀는데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석성은
거의 무너져 내려앉았고 그 흩어진 돌무더기들만이 나뒹굴고있다.
▲ 아막성 가는길의 억새와 잡목구간
▲ "휴~~~~@ 대간이 사람잡네..."
▲ 녹슬었으나 아직은 슬만한 멋진 남근석?
▲ 백제와 신라의 영토쟁탈전이 치열했던 아막성터
16:10 아막성을 내려서니 서서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오전까지 비가 내리다가 오후부터 개인다는 일기예보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30여분이면 복성이재에 도착할 수 있지만 빗줄기가 굵어 우의를 입고 잡목을 헤쳐간다.
등로는 미끄럽고 질어서 신발은 흙투성이가 된다.
꼭지에게 연신 조심하라고 주의시키고
16:40 복성이재에 도착하니 비는 폭우로 변해 사정없이 내린다.
신발에는 빗물이 들어가서 뽀르륵~ 뽕뽕~~ 올챙이 배터지는 소리가 난다.
이때는 방수된다는 ‘고어’도 별 볼일 없어 무용지물이다.
택시에 전화하고 논두렁 개울가에서 신발을 씻고 있으니 이내 택시가 도착한다.
인월까지만 택시를 이용하고 인월에서 여원재는 버스를 타려고 계획했지만 물에 빠진 생쥐꼴로
어떻게 버스를 타나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친절한 기사아저씨 덕분에 중간에 내리기가 싫어
그냥 여원재까지 택시로 이동하며 오늘의 대간행복을 마무리한다.
- 끝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