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산행/지리산

'빗속의 꽃길을 걷다' 추억의 백두대간1(천왕봉-성삼재)

산사랑방 2015. 12. 15. 09:10


 

                         

빗속의 꽃길을 걸으며... 백두대간1

                                             

2007. 8. 4 ~ 8. 6 (2박 3일) 비와 바람 그리고 운무

                                                          

                                                       

 

                                                                    

총산행거리 : 35.17+6 = 41.17km (2박3일) 접근거리 탈출거리포함



 

백두대간 그 꿈의 서두이야기


대간은 우리에게 있어서 요원한 꿈과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어느분이 “왜 대간을 안 하냐.”고 물었을 때 좀 더 산행경력을 쌓고 일상에서 시간이 넉넉할 때,

그때 하겠다고 넘어가곤 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마음이 바뀌고 말았지요.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심경에 변화가 온 것입니다.


아직 가야할 미답지의 산들도 많고 많지만 그곳은 눈길이 가지 않고 오직

천왕봉에서 진부령까지 대간의 마루금만 눈에 들어오니 어쩐단 말입니까.

한번 걸리면 헤어나기 어렵다는 대간병이 서서히 우리에게도 찾아온 것입니다.


대간을 혼자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꼭지(아내)와 함께 하기로 계획을 세웁니다.

GPS는 없어도 고도계가 있으니 도움이 될 것이고, 요즘은 상세한 대간지도까지 나와 있어서

여러 선답자들의 산행기까지 참조한다면 큰 어려움을 없을 것 같네요

첫 지리산구간은 2박 3일의 휴가를 이용해 천왕봉에서 정령치까지 진행하려고 계획은 세웠습니다만


대간은 어느 한 구간 쉽게 넘어가는 곳이 없다고 하더니 결국 정령치까지 가질 못하고 성삼재에서 막을 내렸습니다.

첫 구간부터 이러니 앞으로 진행할 대간행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저 또한 사뭇 궁금해집니다.

2년이 걸리든 3년이 걸리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되도록 천천히

진행할 예정이지만 그 또한 마음대로 될지 의문이네요.



 

 

백무동


원래 계획은 무박으로 출발하여 백무동에서 천왕봉으로 올랐다가 벽소령에서 1박을 하기로 하였으나

꼭지가 천왕봉에서는 한 번도 일출을 보지 못했으니 이번 기회에 꼭 일출을 보고 싶다고 한다.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고 대간을 시작한다?” 대간보다 더 꿈만 같은 이야기

그러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꼭지의 소원을 못 들어주랴 싶기도 하다.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가 마음에 걸리지만 모든 것은 지리의 뜻에 맡기기로 한다.

이러한 날씨에 일출을 볼 수 있다면 그 광경이야 말로 천상의 선경처럼 아름다우리라.

과연 그러한 행운이 우리에게 주어질까?


2박3일의 여정인데 굳이 첫날부터 무박으로 몸을 피곤하게 할 필요 없이 장터목에서 1박을 하고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고 느긋하게 대간을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당초 계획을 수정하여 집에서 잠을 충분히 자고 아침도 먹고 이것저것 준비하여

10시경에 꿈에 그리던 백두대간 그 첫걸음을 위하여 차량회수가 용이한 백무동으로 향한다.


대구의 연일 34도를 오르내리는 찜통더위를 잊기 위해서도 10도 이상이나 기온이 낮은 지리에

빨리 들고 싶지만 산장예약을 하지 못한 터라 비박장비까지 챙기다 보니 배낭무게가 만만치 않다.

대간 종주를 위해서는 3일동안 이 무거움을 견뎌내야 하는데 걱정도 된다.


백무동에 도착하니 햇살이 가장 따가운 한낮이라 온도계는 31도를 가리킨다.

피서객들의 차량으로 주차장은 이미 만차로 가득 차 있었지만 겨우 공간을 찾아 주차를 하고

식당에 들렀더니 특별한 메뉴가 없어 간단하게 비빔밥을 시켰지만 꼭지는 맛이 없는지 반만 먹고 남긴다.


13:00 백무동 철다리를 건너 산문에 들어선다.

세상사 잡다한 온갖 일들은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에 다 씻겨져 가고, 일상의 번뇌들은

한발 한발 내 딛는 걸음에 묻혀져가니 어찌 동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랴.


일기예보는 비가 내린다고 했으나 하늘은 흐리기만 하고 후덕지근한 날씨가

가득이나 느린 꼭지의 걸음을 고무줄처럼 늘어지게 만든다.

백무동 돌길에는 바람마저 인색하여 한 점 불어오지 않으니 걷는 자체가 고역이다.

 

처음 출발할 때 온도계가 31도를 가리켰지만 1시간여 진행하니 벌써 온도는 28도로 내려간다.

조금은 시원해진 것 같다. 고도 100m를 오를 때 기온은 0.6도씩 내려간다고 하니 부지런히 오른다.

장터목까지 오르면 아마 23~24도가 될 것이고 천왕봉에 오르면 20도가 될 것이다.


참샘을 지나 지능선에만 오르면 그때부터는 장터목까지 고속도로라고 뻥을 쳤지만 꼭지는 연신 씩씩거린다.

지리산에는 벽소령에서 음정가는 길 외에는 고속도로가 있다고 들어보질 못했다나 어쨌다나..

참샘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호흡을 고르고는 걸음을 재촉한다.

 

 

 

 


조망이 좋은 망바위에 올라섰지만 운무로 인하여 주능선으로는 조망이 되지 않고 하봉능선이

희미하지만 아름다운 곡선미를 자랑하며 위안을 준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은 설렌다.

한신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신선한 바람은 또 어떤가?슴을 열어젖히고 온몸으로 지리의 바람을 맞는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행복의 바람이기에...



천왕과의 포옹


17:30 장터목

장터목은 언제나 활기에 넘치는 산꾼들로 시끌벅적한 곳이다. 지리산의 생명과 같은 곳

천왕봉이 지리의 뇌에 해당된다면 장터목은 쉬지 않고 피를 공급하는 심장과 같은 곳이다.

이제 정말 지리산에 왔구나. 감격이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아 우의와 물 한 병만 손에 들고 천왕봉을 다녀오기로 한다.

그래야만 내일 새벽에 날씨가 좋지 않으면 천왕의 일출을 생략하고 바로 세석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제석봉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일몰도 기대했지만 오늘은 그것도 여의치 않다.

일몰은커녕 비만 맞지 않아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석봉의 구절초와 산오이풀

 

 

 

                                                                                              

▲제석봉

 

 

 

                                                             

▲천왕을 오르면서 바라본 초암능선과 하봉 

 


제석봉을 오르니 운무에 가려 조망은 없지만 고사목 사이사이로 지천에 피어난 야생화가 반겨준다.

동자꽃, 도라지모싯대, 이제 막 꽃잎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구절초와 쑥부쟁이, 군락을 지은 술패랭이꽃

그리고 산오이풀이 황량하던 제석봉을 아름다운 꽃밭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골의 시원한 바람이 올라오는 곳에는 어김없이 온갖 들꽃들이 목을 길게 빼고 몸을 흔든다.

 

 

                                                                                            

▲통천문

 

 

 

 

 
 

 

 

 

 

 


 

 

천왕봉에는 방학을 맞아 찾아온 학생들 몇 명 이외에는 조용하기만 하다.

학생들에게 사진도 찍어주고 우리도 천왕의 표석을 끌어안고 오랜만에 사진도 한 장 남긴다.

대간의 첫 출발을 자축하며...



장터목의 산꾼들.. 그리고 비박


장터목에서 산장예약도 하지 못한 터라 일찌감치 입구에 있는 취사장에 비박자리를 마련한다.

취사장은 비를 피할 수 있어서 좋고 기다란 나무받침대는 침상역할을 해준다.

첫 방송때는 100% 예약이 완료되어서 잠자리가 없으니 비 예약자는 모두 하산하라고 종용하더니

7시가 넘어서자 남은 침상이 많으니 모두 다 들어와서 자라고 한다.


장터목에서 모두 다 재워주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피소안 침상에 누우면 시끄러운 소음과 좁고 답답하여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래서 꼭지만 침상을 배정받아 안으로 들여보내고 몇 분의 산님들과 취사장에서 그냥 비박하기로 한다.


멀리 원주에서 오셨다는 두 분, 서울에서 오셨다는 젊은 부부, 그리고 수염이 텁수룩한

시인인 듯한 한분과 산청에서 오셨다는 홀로 산꾼과 저녁 늦게까지 얘기꽃을 피운다.

모두 산에서 처음 만난 분들이었지만 서먹함도 없어지고

마치 오래전부터 만난 지기처럼 스스럼없이 산에 대한 얘기가 이어진다.

 

 

 

 

 

시인이 가져온 약주가 한순 배 돌고, 그것이 바닥나 다시 소주가 몇 순배 돌고나서야

대간이야기, 치악산 종주 이야기로 장터목의 밤은 산꾼들의 주고받는 정만큼 더욱 깊어만 간다.

원주 치악산, 늦가을에 단풍이 더욱 아름답다는 구룡사와 영원사계곡

그리고 전재에서 기리파재로 이어지는 환산적인 치악산종주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홀로 종주했던 그때의 추억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진다.


서울서 지리산에 처음 왔다는 젊은 부부는

성삼재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하루종일 흰구름밖에는 보지 못했다고 투덜댄다.

진주가 땅에 떨어져있어도 알아주는 이 없으면 흙속에 묻힌 돌과 같은 존재가 된다.

진정한 산꾼은 보이지 않는 진주를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며

모두들 한 마디씩 충고 아닌 충고를 해준다.


우리가 젊은 시절, 한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노력하듯이

지리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도 수 없이 그를 찾고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어려움을 극복하였을 때

진정한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처음 지리산에 왔을 때는 오직 힘든 돌길만 걸었다는 기억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장터목에서의 밤은 깊어만 갔다.



빗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연하선경


새벽4시

요란한 빗소리에 잠이 깬다. 폭우가 쏟아지는 것 같다.

시멘트바닥에서 자던 산님들은 물이 스며든다며 침낭을 정리하여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2층(?)이다보니 그럴 걱정은 없었지만 5시가 넘으면서는 천장에서도 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천장의 빗물은 피할 수가 없어 침낭을 정리하고 꼭지가 나오길 기다리며 밥을 짓고 우거지국을 끓인다.

산에 가면 밥 짓고 그릇을 닦는 일은 당연히 남자의 몫이라고 한다.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해보면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다.


예상대로 일출은 기대할 수 없다.

아침밥을 먹고 기다려보지만 비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외면한 채 쏟아져 내린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우의를 입고 세석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다행이 비는 많이 내리지 않고 기온도 평균 21도라 걷기는 편하다.

 

 

 

                                                                                   

 

 

 

                                                                                        

 

                                                                                        

▲연하선경

 

 

 

 

도장골 풍경 

 

 


연하봉을 지날 때는 지천에 피어난 들꽃들이 반겨주고 가끔 운무가 연하봉 주위를 맴돌며 선경을 연출한다.

그 사잇길로 형형색색의 배낭카바를 쉬운 산꾼들의 행렬이 운무와 더불어 장관을 이룬다.

비 내리는 날의 운치가 이런 것인가 보다.

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만으로도 오늘 하루를 다 보상 받은 듯하다.

설사 하루 종일 비를 맞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도 말이다.


세석산장을 그냥 통과하여 바로 벽소령으로 향한다.

세석에서 벽소령구간은 능선 중에서 가장 힘들게 느껴졌던 구간으로 기억된다.

거리도 6km에 가까운 먼 거리인데다 선비샘까지는 너덜길도 많고

오름과 내림의 굴곡이 심해 체력이 많이 소모되는 곳이다.

힘들어하는 꼭지, 거기다가 빗줄기도 더욱 거세어져서 진행은 더디기만 하다.

 

 

                                                                                           

▲칠선녀가 내려와 쉬어갔다는 칠선봉

 

 

 

                                                                                           

▲선비샘


 

 

                                                                                

▲벽소령가는 길의 야생화

 

 

 

                                                                                     

▲하늘정원

 


그런데 또 나쁜 소식이 전해진다.

호우특보가 발효되어서 지리산 전 구간이 산행이 금지되고 입산통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또 벽소령에서 쫓겨나야 한단 말인가.

2년전에 호우특보에 음정으로 쫓겨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또 그와 같은 일은 겪어야 하다니

일단 벽소령산장에서 점심을 먹으며 사태를 관망해 보기로 한다.



웃고 울리는 호우특보


12시 벽소령대피소

취사장에 들어서니 구석자리에 이미 한분이 자리를 잡고 앉아계신다.

인사를 드리고 어디까지 가시느냐고 물으니 연하천까지 간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대간을

시작했다고 하니 그분도 홀로 갈령까지 진행하였다고 한다. 반가웠다.

동지와 같은 대간꾼을 만났으니.


우리도 아예 자리를 펴고 라면을 끓이기 위해 버너에 불을 붙인다.

산장에서 끓여먹는 라면은 맛이 특이하다. 달콤(?)하면서도 매콤하고 그리고 뒷맛이 엄청 시원하다.

매점에서 햇반을 하나 사서 라면국물에 말아 먹으니 천하가 내 것처럼 든든하다.

배가 부르니 한없이 걷고 싶어지는데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다.


벽소령의 날씨는 여전히 흐리고 대성골에서 올라오는 바람은 막힘이 없어 산장을 날려버릴 듯이 달려든다.

공단직원은 산장에서 숙박도 되지 않으니 무조건 하산 하라고 한다.

그렇다고 쉽게 물러서기는 너무나 아쉬움이 많다. 얼마나 계획하고 준비한 종주인데..

하늘을 보니 비는 더 이상 올 것 같지가 않아 호우특보가 곧 해제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시간도 넉넉하고 하니 우리 해제될 때 까지 그냥 여기서 기다리자.”


그분도 동참을 하고 꼭지는 아예 침낭을 펴고 드러눕는다.

3시쯤 되니 공단직원 두 사람이 들어오더니 쓰레기가 많다면서 투덜투덜 취사장 청소를 한다.

계속 누워있는 꼭지를 보더니 빨리 하산하지 않으면 50만원 과태료를 물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50만원이라는 말에 미동도 않던 꼭지가 벌떡 일어난다. 돈의 위력이다. 서방님보다도 더 큰 위력??

 

 

                                                                

▲벽소령에서 잠시 하늘이 열리고...

 


오후 3시

일기예보를 들으니 앞으로도 2~3일간 계속 비가 내린다고 한다. 좋은 소식은 하나도 없다.

무심한 하늘을 또 올려다본다. 하늘이 또 어두워지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골을 타고 올라오는 바람은 여전히 그 속도를 누그러뜨림이 없이 짙은 운무와 더불어 산장을 휘어 감는다.

야속한 하늘... 대간 첫 구간을 마무리도 못한 채 이렇게 접어야 하는가?


15:10 더 이상 있어봐야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주섬주섬 배낭을 꾸리고 음정으로의 하산를 위해 취사장을 나선다.

마음 같아선 연하천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친 듯 뭐하랴. 연하천에 가면 또 쫓겨날 것을...

음정까지는 6km가 넘는 구간이지만 초반 급경사 10분정도를 내려서면

고속도로같은 임도길이라 채 2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임도에 내려서니 운무는 벽소령고개를 넘지 못하고 바람은 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진다.

멀리 삼봉산까지 훤히 조망이 트이고 부채살처럼 뻗어내린 한신과 백무동방향 계곡으로는

엷은 햇살이 가득 비쳐든다. 벽소령의 하늘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무심한 하늘


“잘됐다. 차라리 우리 백무동에 가서 자고 내일 다시오자.”


날씨가 이대로라면 오후 늦게나 내일은 분명히 호우특보가 해제될 것이다.

그러면 내일 새벽에 다시 음정으로 올라오자는 나의 제안에 꼭지도 찬성을 한다.

예전 같으면 집으로 가자고 난리를 쳤을 터인데 꼭지에게도 대간병이 들긴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잠은 어디서 잔다? 함양 찜질방? 아님 백무동야영장에서 비박?

여러가지 생각이 꼬리를 무는데 비만 내리지 않는다면 백무동야영장에서

비박하는 편이 훨씬 운치도 있고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음정으로 쫓겨나는 길에 바라본 마천방향의 조망

 

 


임도를 터벅터벅 1시간여 내려가니 연하천에서 쫓겨나신 산님들이 한 무리 하산하여 내려온다.

길이 얼마나 험한지 바지와 신발이 흙투성이가 되어있다.

바로 그때 먼저 내려간 산님 두 분이 다시 올라오는 게 아닌가.


“왜 다시 올라오십니까?”

“조금 전에 해제되었답니다.”

“네~~?”



잠 못 이루는 연하천의 밤


그 짤막한 한 마디지만 우리는 그 뜻을 안다.

이 얼마나 기다리던 소리던가. 그래도 행여나 헛걸음칠까 공단에 확인 전화를 걸었다.

호우특보가 해제되었다는 여직원의 상냥한 목소리.. 공단직원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갑게 들리긴 처음이다.

다른 분들과 섞여서 우리도 벽소령으로 다시 방향을 잡는다.

원래는 뱀사골에서 비박하고 내일 정령치까지 가려고 했지만 시간상 도저히 뱀사골까지

갈 수가 없을 것 같아 연하천으로 계획을 수정한다.

 

 

 

                                                                

▲오늘 가장 힘들게 느껴지는 형제봉

 


20:00 연하천대피소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산장에는 예상외로 산님들이 많다.

거의 30여명은 되어 보인다. 전혀 예상 밖이다.

비는 여전히 조금씩 내리고 있지만 이슬비를 맞으며 한 무리의 학생들이

야외테이블에 앉아 압력밥솟에 밥을 하고 삼겹살을 굽고 있다. 산장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다.


산장지기에게 라면을 2개 달라고 했더니 저녁에 라면을 먹어서 소화가 잘 되겠냐며

여기 학생들의 밥이 남으니 같이 먹어도 된다고 한다.

그때 인솔자인 듯한 한 분이 식사를 같이 하자며 권유를 한다. 무척 고마웠다.

저녁을 먹고 10시쯤에 잠자리에 들었으나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깬다.


아이 둘을 동반하고 부인과 함께 온 산님 한 분이 술에 취하여 대피소안에서 고함을 지르고

만류하는 주위의 산님들과 시비가 붙어 싸우고 난리를 친다. 도대체 잠을 잘 수가 없다.

기본 에티켓도 없도, 질서도 없고, 이건 완전히 무법천지가 따로 없다.

그렇다고 술에 만취한사람을 상대할 수도 없으니 어쩌랴. 오직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다행히 마음이 너그러운 산꾼들이었기에 이해하여 큰 사고는 나지 않았고

아침에 그분은 모두에게 사과를 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동자꽃


06:00 연하천의 아침

행여나 했지만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는데 이슬비 수준이다.

취사장에서 마지막 남은 쌀로 밥을 지어 아침을 먹는다.

라면 두 개를 사서 배낭에 넣는다. 나중에 알았지만 노고단에는 라면을 팔지 않는다고 했다.


07:50 쯤 연하천을 출발한다.

여전히 비는 오다 말다를 반복한다. 산정의 기온은 20~21도를 가르키고

우의 때문에 몸은 약간 덥기는 하지만 산행하기에는 딱 좋은 날씨다.

조망이 없는 대신에 지천에 피어있는 야생화가 반겨준다.

 

 

                                                                          

▲연하천산장의 아침풍경

 


도라지모싯대는 지리산 어디에 가도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꽃이다.

하지만 늘 처음처럼 새로움과 신선함을 전해준다. 빗물을 머금고 수줍게 고개숙인

그 청초한 모습은 차라리 감동이다. 동자꽃은 또 어떤가. 옛 어른들이 소원을 빌 때 하늘을 올려다보듯이

동자꽃은 대부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있다.


스님과 동자에 얽힌 전설처럼 누구를 향한 기다림인가.

스님을 기다리다 죽어간 한 소년,, 그가 죽어서 피어난 꽃이 동자꽃이다.

밤에는 달빛에 떨어지는 찬 이슬에 젖고 오늘처럼 비 내리는 날은 온몸으로 비를 맞는다.

그 속에서 스님이 돌아오시지 않나 길에 목을 빼고 기다리는 지리산 지천에 피어있는 동자꽃

그는 여름이면 늘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토끼봉에서의 환상적인 조망


09:25 토끼봉

처음 지리산에 왔을 때는 토끼봉에 산토끼가 엄청 많은 줄 알았다.

그런데 산토끼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최근에는 공단에서 안내판에 토끼를 한 마리 그려놓았다.

그 그림토끼가 힘들게 올라오는 산님들을 반갑게 맞이해준다 (반달곰 그림이 왜 토끼그림으로 보였을까?)

토끼봉은 노고단에서 출발하면 종주 중 제일 힘든 구간으로 기억된다.

그 땀에 대한 보답인가. 갑자기 조망이 트인다.


남쪽 삼신봉으로의 능선이 시야에 들어오고 하동방향으로 왕시리봉도 운무속을 뚫고 높음을 뽐낸다.

그 뿐이 아니다. 헬기장 너머로는 온갖 야생화들이 자태를 뽐내며 손을 흔든다.

운무가 아름답게 넘나드는 왕시리봉.. 그야말로 환상적인 풍경이다.

처음으로 지리가 몸을 드러낸 것이다. 비록 잠깐이긴 하였지만 틀꼬박 우중산행의 아쉬움이 다 녹아내리는 듯하다.

 

 

                                                              

 ▲토끼봉에서 바라본 천왕봉까지의 주능선

 

 

 

                                                                   

▲토끼봉에서 바라본 하동방향

 

 

 

                                                                 

 ▲불무장등과 왕시리봉

 

 

 

                                                     

 ▲멀리 운무가 휘감아 도는 왕시리봉, 정말 행복에 겨운 풍경이 아닌가 싶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화개재로 내려선다.

그곳에는 원추리가 더욱 선명한 빛으로 노란색을 토해내고 몇 몇의 산님들은 전망대 장의자에 앉아 망중한을 달랜다.

뱀사골산장은 폐쇄되었는데도 여전히 이정표는 그대로 있다.

산님 두 분이 산장으로 내려간다기에 산장은 이미 폐쇄되었다고 알려드리니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그곳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온다는 것 또한 여간 고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개재에서 바라본 뱀사골방향 
 

 

 

                                                                                 

 ▲화개재의 풍경 1


 

 

 

 

                                                              

 

▲화개재의 풍경 2

 


화개재에서 삼도봉 오름 길, 지겹도록 많은 나무계단.. 그 계단은 정확하게 몇 개가 될까?

갑자기 장난기도 발동하고 계단을 오르는 지루함도 없앨 겸 100개씩 세어보면서 올라간다.

직접 세어보니 그 계단의 수는 총 551 계단이었다.

빌딩을 오른다고 생각하면 아마 30여 층을 걸어서 올라가는 것과 같이 빡씬 구간이었지만

셈하며 올라간 덕분에 별로 힘든 줄 몰랐다.

 

 

 

                                                               

 ▲삼도봉오름길... 빌딩 30여층 높이의 551계단

 

 

 

                                                                    

▲오늘은 전혀 조망권이 없는 삼도봉

 

 

 

                                                                                            

 ▲반야봉 갈림길인 노루목

 


11:15 노루목, 날씨가 좋으면 반야봉에도 올라가려고 했으나

오늘은 생략하고 정령치까지 가기위해서 체력을 아끼기로 한다.

노루목에서 임걸령가는 길은 계단을 설치하고 등산로를 새로 정비하여 걷기가 훨씬 편해졌다.



성삼재에 남겨 둔 행복


12:00 임걸령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또 비가 쏟아진다.

샘물은 변함없이 쏟아져 나온다. 한 바가지 들이키고, 또 한 바가지는 머리에 퍼 붓는다.

한결 시원하다. 늦었지만 점심은 노고단대피소에 가서 먹기로 하고 길을 재촉하지만

꼭지의 체력이 한계에 도달했는지 걸음걸이가 많이 더뎌진다.


13:30 노고단에서 라면을 끓여 아침에 먹다 남은 밥과 때늦은 점심을 즐긴다.

성삼재에 도착하니 오후 3시, 아니라 다를까 우려했던 꼭지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다음구간을 정령치에서 출발해야 차량회수가 용이할 테지만 그렇다고

우중에 청령치까지 4~5시간의 무리한 산행을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던가.

오늘은 성삼재에서 산행을 끝내겠다고 하니 꼭지가 이외라는 듯 좋아한다.

 

 

                                                               

▲돼지평전에서 바라본 대간의 마루금과 만복대

 

 

 

                                                                    

▲원추리가 노랗게 물든 노고단 고개


 

 

 

                                                                     

▲섬삼재 가는 길에 내려다본 화엄사 방향

 


탐방안내소 앞에는 콜벤이 대기하고 있다. 얼른 올라타고 싶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휴게소 정자에 앉아 있는데 콜벤 기사아저씨가 다가온다.

백무동까지 35,000원, 3년전 종주할 때도 35,000원이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도 없다.

꼭지가 기사아저씨에게 3일간 세상에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다.

특히 아프칸에 잡혀있는 분들은 풀려났느냐고. 여전히 풀려나신 분은 없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세상을 잊은 채 3일간 지리산에 머물렀다.

그 행복을 성삼재에 남겨두고 싶지 않지만 다음에 또 맛보기 위하여 남겨둔다.

우리는 다시 이 길을 오를 것이다. 성삼재에 남겨진 행복을 찾아서~~~~~~



 

- 끝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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