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산행/겨울스케치

천년을 흐르는 신라의 숨결 '용장사지' <경주 남산>

산사랑방 2012. 3. 13. 08:40

 

 

천년을 흐르는 신라의 숨결 '용장사지'<경주 남산>

 

2012. 3. 11. 꼭지와 둘이서

 

용장골-삼화령-금오산-삼릉골 (약 4시간)

 

 

 

 

경주 남산은 2003년 여름, 가랑비가 추적추적 슬프게 내리던 날 꼭지와

우의입고 우산쓰고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포석정-금오산-삼불사로

하산하였는데 운무속에 조망이 없는 대신 암벽에 새겨진 많은 석불을

보면서 일반산행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감동을 받았었다.

 

흔히들 "남산에 오르지 않고는 경주를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할

정도로 남산은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곳

이기도 하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나정'에서 부터

신라 종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포석정지'에 이르기까지...

 

이곳에는 150여 곳의 절터, 120여 구의 석탑이 남아 있다고 하니 남산은 

신라 역사의 시작과 끝을 고스란히 담고있는 노천박물관인 셈이다.

 

 

 

수려한 암반사이로 맑은 물이 청아하게 흐르는 <용장골의 풍경>

 

오늘은 무엇보다도 삼국유사의 배경이 되고 김시습의 흔적이 남아있는

용장사지를 답사하고, 남산에서 가장 많은 불상이 산재한 삼릉골을 하산로

로 잡았다. 최초의 한문소설집으로 알려진 김시습의 '금오신화'와 '삼국유

사'에 얽힌 자세한 내용은 남산기행으로 나누어 따로 정리하기로 하고...

 

용장사지 들머리인 용장골의 계곡 또한 불상의 아름다운 각선미를

닮았는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용장골의 서정은 등산로 옆에 세워

져 있는 김시습의 '용장사'라는 한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용장사

                                  - 김시습 -

 

용장골  깊으니

오가는 사람 없네

보슬비에 신우대는 여울가에 움 돋고

비낀 바람은 들매화 희롱하는데.

 

작은 창가에 사슴 함께 잠들었네

의자에 먼지가 재처럼 쌓였는데

깰 줄 모르네 억새 처마밑에서

들꽃은 떨어지고 또 피는데.

 

 

茸長山洞窈  용장산동요

不見有人來  불견유인래

細雨移溪竹  세우이계죽

斜風護野梅  사풍호야매

 

小窓眠共鹿  소창면공록

枯椅坐同灰  고의좌동회

不覺茅簷畔  불각모첨반

庭花落又開  정화락우개

 

 

 

세월의 무상함만 더해주는 <용장사지>

 

용장사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유가종의 시조인 대덕 대현스님이 머물렀던

곳이다. 김시습은 21세 때 과거를 준비하다가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접

하고는 붓을 집어던지고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방랑의 길에 들어섰다.

 

10년 뒤 31살 때 남쪽 은적암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곳 용장사터에 토굴을

지어 7년간 속세와 인연을 끊고 마음을 추스리며 '금오신화'를 저술했다.

 

용장사터 앞에 매화나무가 있어서 '매월당'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전해

진다. 달빛을 받으며 파르르 떨고 있는 매화송이가 어쩌면 자신의 처지

와 닮았을지도... 지금의 용장사터에는 매화나무는 없고 제멋대로 자란 

대나무숲이 우거져 세월의 무상함만 더해준다.

 

 

 

천년의 슬픔을 간직한 <부서진 옥개석> 한 조각

 

용장사터에서 우측길로 올라서면 앞이 환히 트이는 곳에 커다란 옥개석

한 조각이 떨어져 있고 조금 더 올라서면 목 없는 대좌불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무엇을 염원하고 무엇을 지키고자 했기에 이토록 큰 몸부림으로 앉아계시는지...

그 옆 암벽에는 마애여래좌상이 은은하고 고운 미소를 띠며 객을 반긴다.

 

 

 

욱면을 닮았다는 은은하고 고운 미소의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대현스님이 돌면 스님따라 얼굴을 돌렸다는 목 없는 <삼륜 대좌불>

 

삼국유사에 의하면 대현스님이 용장사에 머물렀을 때 스님이 염불을

외면서 주위를 돌면 장륙상도 스님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홈이 파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얼굴을 너무 돌려서

목이 부러졌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대현스님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참으로 절묘한 풍경속의 아름다움이다. 대좌불은 용장사지, 옛 서라벌을 

향해 앉았다. 중생을 향한 끝없는 계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듯...

 

 

 

하늘을 떠받치고 선

 

 

 

이 세상을 다 품에 안을 듯한 <용장사지 삼층석탑>

 

 

 

김시습은 날마다 이곳에 올라서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부당함과, 죽어간 사육신의 충정을『금오신화』에 불어놓고자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건너편에는 "나는 다 알고 있소." 하며 남산의 최고봉 고위봉이

 그윽한 눈길을 보내온다.

 

 

 

상념을 접고 뒤를 돌아보면 멀리 낙동정맥 산줄기가 장엄하게 펼쳐지고...

 

 

 

충담스님이 차를 공양했다던 미륵세존불이 앉았던 <삼화령 연화대좌>

 

 

 

삼화령 봉우리에 오르니 미륵불을 잃어버린 연화대좌가 옛 이야기

를 듣고 가라며 객의 걸음을 잡는다. "내가 누구인고 하니..." 경덕왕 때

향가인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스님이 해마다 삼월 삼일,

구월 구일에는 이곳 삼화령에 와서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미륵세존은 흔적조차 없고 연화대좌만 남았다.

 

연화대좌는 지름이 2m에 이르고 대좌 아래쪽에는 생의사터로 추정

되는 절터가 남아 있다. 三花嶺의 령(嶺)은 고개를 의미하기도 하고

높은 봉우리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금오봉과 고위봉 두 봉우리의

중간에 해당하는 이곳 봉우리를 합하여 삼화령이라 부른다고 한다.

 

 

 

생의사터에서 바라본 남산의 최고봉(495m)인 <고위봉>

 

 

 

신라 효소왕와 진신석가의 재미난 얘기가 전하는 비파골능선이다.

비파골? 왜 비파골이라 했는지 모르지만 수많은 석공들의 석불을

다듬는 망치소리가 계곡을 울리면 비파소리로 들렸을까...

 

 

 

남산의 제2봉인 금오산(468m)

 

 

 

우측 단석산에서 고헌산으로 흘러내리는 낙동정맥 산줄기가 참으로 유장하다.

 

 

 

너무 커서 입상처럼 보이는 삼릉골 벼랑의<마애석가여래좌상>

 

 

 

암벽에 새겨진 여래상을 보노라면 연약하면서도 강한 신라인의 힘이 느껴진다.

화랑으로 무장하고 불도로서 구심점을 삼았기에 천 년을 버티지 않았나 싶다.

 

 

 

상사병에 걸린사람, 아이를 원하는 사람이 빌면 그 소원을 들어준다는 <상사바위> 다만,

 

 

 

위쪽에 보이는 가로로 길게 패인 틈으로 돌을 던져서 저곳에 돌이 

얹혀야만 소원을 들어준다는데... 여궁속으로 돌을 던지라?

 

"...............???"

 

 

 

상사바위와 티격태격 소원빌고 돌아나오면

갑자기 앞이 훤하게 트이고 시원하게 펼쳐지는 풍경...

 

 

 

굽이쳐 흐르는 형산강과 천년의 도읍지 서라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상선암으로 내려서면 요사채 바로 옆에는 상처뿐인 조각상이 흙속에 묻힌

채로 누워 있다. 원래는 '선각보살입상'이었다는데 상체와 발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삼릉골의 감동과 미소 <삼릉골 석불좌상>

 

 

 

 

 

 

거대한 바위 전체가 석불로 단장되어 있는 <삼릉골 선각육존불>

 

 

 

미소를 잃어버린 <삼릉골 석조여래좌상>

 

목을 내놓은 이 부처님은 지장보살로 알려져 있다. 보살은 한 등급 위의

부처가 되기위해 중생을 선도하고 구제하는 일에 전력을 다할 뿐만 아니라

중생들이 바라는 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지장보살은 죄 많은 중생이 지옥에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다면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감동스런 보살님이다.

 

 

 

수수한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삼릉골 마애관음보살상>

 

역시 삼릉골은 부처님의 세계다. 남산 39개 골짜기 중 가장 많은

불상조각이 있다더니 역시 바위마다 길목마다 부처님이 자리해 있다.

죄 많은 우리 중생들을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해...

 

 

 

삼릉길로 내려서니 마음이 처연해 진다. 어질고 부드러운 소나무숲

사이로 천 년의 향기가 온 몸으로 배어들어오는 느낌이다.

 

 

 

삼릉 주위에는 기이한 소나무가 가지각색의 형상으로 릉을 지키고 섰다.

예로부터 도래솔이라 하여 왕릉주위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신령스런 기운

마져 든다. 삼릉골 입구를 기준으로 맨 앞의 능이 제54대 경명왕릉, 가운데

는 제53대 신덕왕릉, 맨 뒤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제8대 아달라왕릉이다.

 

 

 

용장골에서 삼릉까지 쉬어가면서 천천히 걸으니 약 4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30분 마다 시내버스가 다니니 차량회수도 용이하고 앞으로

남산을 자주찾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산을 제대로 답사하려면

아마 일주일도 모자라지 싶다.

 

 

 

남산 산행안내도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ㅡ END ㅡ